철법(徹法)
엄마가 시외전화를 하셨다. 몇 달째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딱 잡아뗐다. 통장에 송금날짜가 찍힌 것을 낱낱이 말하는데…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언제부터 나에게 돈을 맡겨놓으셨나. 어찌 그리 당당할 수가 있을까. 송금날짜를 깜박했던 것은 미안했지만, 나는 남편을 붙잡고 “엄마도 아니다.”라고 몇 날 며칠 흥분을 했었다. 돈 때문이 아니다. 전화를 끊으시면서 “자동이체 해라.”라는 말 때문이었다.
엄마는 30여 년 전, 딸을 부산으로 시집보내고 매번 서울역에서 울었다. 그리곤 집에 도착하면 시집살이하는 나에게 꼭 전화를 하셨다. “모질고 독한X, 너는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더라.”라며 매정하다고 했다. 꼭 너 닮은 딸 하나 낳아 키우라는 말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늘 내 월급날을 기다렸다. 매달 25일이면 무교동에서 메밀국수를 먹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일 년에 두 번 크리스마스에는 송추 그랜드산장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섣달 그믐달은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종각으로 갔다. 스웨터 하나를 사도 원피스 하나를 맞춰도 엄마 것부터 해 드리고 내 것을 샀다. 엄마는 혼자서는 건널목도 건너지 못하는 어수룩한 사람이셨다. 오로지 딸을 서방 삼아 보호자 삼아 껌딱지 모녀지간으로 엄마와 나는 그렇게 살았었다.
애공이 유약에게 물었다. “해에 흉년이 들어서 재용이 부족하니, 어찌하겠는가?” 유약이 대답하였다. “어찌하여 철법을 쓰지 않습니까?” 애공이 말하였다. “10분의 2도 내 오히려 부족하니, 어찌 철법을 쓰겠는가?” 유약이 대답하였다.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께서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실 것이며, 백성이 풍족하지 못하다면 임금께서 누구와 더불어 풍족하시겠습니까?” (哀公이 問於有若曰 年饑用不足하니 如之何오 有若對曰 盍徹乎시니잇고 曰 二도 吾猶不足이어니 如之何其徹也리오 對왈 百姓足이면 君孰與不足이며 百姓不足이면 君孰與足이리잇고 顔淵 9장)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철(徹)이라는 글자에서 문득, ‘자동이체’란 말이 떠올랐다.
훈풍 부는 어느 봄날, 나는 아들 내외와 함께 외식을 하고 며느리 집으로 따라갔다. 내가 아무리 논어를 날마다 읽는다 해도 이천오백여 년 전의 주(周)나라의 *철법(徹法)을 반드시 따를 이유는 없다. 새 며느리에게 말을 하려는데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몇 번 심호흡해도 용기가 나지 않는다. 머뭇머뭇 눈길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니니, 부모를 신처럼 섬기라고는 안 한다.” 그 대신 “네가 받는 월급의 텐프로를 다오.” 엄마에게만 주면 아버지가 서운해 하실지 모르니 따로따로 달라고 했다. 내킨 김에 잠시 숨 고름을 하고 연이어 위풍당당하고 큰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했다. 너도 네 연봉에서 텐프로를 장인 장모께 드려라. 둘 다 중간에 직장을 그만두거나 하면, 그때는 형편대로 해도 괜찮다. 그리고 혹시 날짜를 잊을 수도 있으니…, ‘자동이체’를 하면 편리하다. 이건 리허설이 아니다. 내가 내 입으로 직접 말했다.
처음 며느리를 맞아들여 엄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태공(太公)의 말을 마음에 되새기며 ,스스로 자신에게 ‘파이팅’을 외쳤다. 생글생글 웃으며 듣던 새 며느리가 점점 긴장한다. 아들은 대놓고 뜨악한 얼굴로 우리 부부를 빤히 쳐다본다. ‘부모 맞느냐?’ 하는 표정이다. 나는 다시 못을 박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다.” 한마디 더 붙여 ‘사람 사는 도리’라고 말을 하려는데…,
“그럼, 난 엄마 아빠 안 봐요.” 한방의 강한 펀치가 날아왔다.
텐프로를 주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아예 부모를 안 본단다. 순간, ‘너 닮은 딸을 낳아라.’던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안심하면서 살았던가. 천만다행으로 아들만 둘을 낳았으니 의기양양 엄마 앞에서 유세를 떨면서 살았었다.
이런 고얀 놈이 있나. 그래도 그렇지 “너는 누가 봐도 엄마를 쏙 빼닮았는데…, 어찌 네가 나를 안 보고 살 수가 있겠니?” 아주 차분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교양까지 옵션으로 얹어 말했다.
“아들아, 안 본다는 말은 당장 사과하거라.”
“예, 엄마 잘못했어요”
자식에게 텐프로를 받으려다 어미의 자존심 십일조도 못 건졌다. 엄동설한에 찬물 끼얹은 헤프닝, 자식에게 부모는 과연 몇 프로 정도일까.
* 徹法 :주(周)나라 때의 조세법(租稅法). 백무(百畝)의 사전(私田)을 받은 사람이 십무(十畝)의 공전(公田)을 경작하여 그 수확을 관청에 바침. 곧, 십분지일(十分之一)의 납세(納稅)법.
<<에세이부산>> 10호
《논어에세이 빈빈》 2014
류창희
http://rchess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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