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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에세이, 빈빈

상견례에서 ‘통과!’ 세 번을 외친 사연

팔일무어정(八佾舞於庭)

 


 

나는 건배하기를 좋아한다. 그날도 나는 건배를 세 번이나 했다.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2층 창가에서 내려다보니 아들의 여자친구와 부모님이 차에서 내린다. 1층까지 뛰어 내려가 살갑게 맞이했다. 

 

“딸을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이것 드세요 저것 드세요, 권하기는 해도 접시가 비워지지 않으니 서로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자식혼사의 상견례라는 것이 참 어려운 자리다.

 

내가 먼저 말했다. “우리 예물 예단, 번거로운 절차는 모두 생략하도록 해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신부 어머니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섭섭하지 않으시겠어요?” 순간, 왜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이 떠올랐는지. 눈물이 나오려 해 얼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나의 마지막 모습을…,”이라고 말하다가 말았다. 주책도 바가지다. 살아생전 아무리 며느리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불호령을 해도 결국은 그 며느리 앞에서 떠날 것이다. 

 

“자~! 한잔합시다.” 내가 잔을 치켜드니 두 집 아버지들도 얼떨결에 따라 한다. “예물 예단, 통과!” 아이들이 서로 좋아한다는데 무슨 걱정인가. “누구 말도 듣지 마세요, TV 연속극도 보지 마세요.” 신부집도 우리 집도 개혼(開婚)이다. 그렇다면 양가 어른과 형제들은 어찌할 것인가. 나는 다시 잔을 치켜들며 “각자 집에서 알아서 합시다. 통과!” 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 딸 아들 낳아 시집 장가보내는데 엄마들은 한복 한 벌씩 해 입으면 어때요? 또 잔을 치켜들었다. “통과!” 어디 국회에만 통과망치가 있을까. “통과” 세 번 외치고 잔 세 번 부딪혔다. 공자는 “두 번 검토하면 괜찮다(再斯可矣)고 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지나치긴 하지만, 세 번째 마무리 건배를 하니 드디어 혼사가 실감이 났다. 한 달 뒤, 한복 곱게 차려입은 두 안사돈이 아이들의 화촉(華燭)을 밝혔다. 

 

언제부터 우리가 모두 사대부 가문이 되어 예단 예물 예식으로 예의범절을 갖췄는지 알 수 없다. 

 


공자가 계씨를 비판하여 말했다. “팔일을 뜰에서 춤추게 하다니, 이런 짓을 감히 할 수 있다면, 장차 그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할 것인가!”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 팔일편)

 


공자 시절에 천자(天子) 앞에서만 가로세로 여덟 줄 64명으로 추게 돼 있는 ‘팔일무(八佾舞)’를 대부신분으로 자기 집 뜰에서 분수를 모르고 펼쳤던 계씨(季氏) 집안이나 다를 바 없다. 늘 남들이 문제다. 남의 며느리가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모르겠다. 명절에 시댁에 왔었는지, 어버이날에는 뭘 선물했는지 묻는다. 며느리에게서 명품가방, 명품지갑, 모피코트, 이부자리, 은수저와 반상기를 받았느냐고 묻고 또 묻는다.

 

‘혼인하고 장가드는 데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했다. 우리는 사돈 간에 서로 뜻을 존중해준 덕분에 다행히 오랑캐 대열을 면했다.

 

내가 아들의 혼사를 간소하게 치른 것은 내 결혼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나는 없는 집 딸로서 내 손으로 벌어 혼수품을 마련해야 했다. 연애기간 동안 수첩에 빼곡하게 메모하고 서울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을 들락거리며 그릇세트, 술잔, 커피잔 같은 물건들을 구하러 다녔다. 명주실로 도포끈을 매듭으로 맺고, 먹을 갈아 여덟 폭의 반야심경(般若心經) 병풍을 손수 썼다. 구정뜨게실로 쿠션 식탁보 커튼을 짜고 오색실로 수를 놓았다. 그렇게 해야 시집가는 줄 알았다. 나는 결혼한 지 서른 해가 넘었다. 그런데 아직도 상자 속에서 꺼내지 않은 잡동사니 혼수품이 그대로 들어 있다.

 

예단도 많이 받았다. 물건목록이 두루마리 한지에 줄 맞춰 적혀 있었다. 그 보석, 그 옷가지들, 그 화장품…. 앞치마 입고 호되게 시집살이하는 나에게 도움되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낯선 곳으로 시집온 나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말 한마디, 환한 웃음, 편안한 잠자리였다. 시어머님은 예물로 고급시계를 넣어주셨다. 그 귀하다는 물건은 나에게 고삐였다. 모파상 소설에 나오는 ‘진주 목걸이’였다. 나는 몇 년 동안 월부로 갚듯이 매달 시어머니께 돈을 드렸다. 물론 달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며느리의 자존심을 그렇게 지켰다. 그때부터 ‘내 아이들에게는 내가 아프고 싫었던 것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 후, 풀꽃 부케 한 아름 안은 소박한 결혼은 나의 꿈이 되었다.

 

요즘 나도 바쁘고 남편도 바쁘고 며느리도 바쁘고 아들도 바쁘다. 바쁘게 일하는 가운데도 며느리는 내게 “메뉴 뽑아 놓았어요.”라고 카카오톡을 보내 함께 외식도 자주 한다. 내가 며느리를 껴안아 주면 저도 덩달아 팔에 힘을 준다. 

 

내가 며느리에게 새삼 무엇을 가르칠까? 궁중음식, 신선로, 떡국 위에 얌전하게 삼색 고명 얹는 것, 그런 건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다 나온다. 시어머니, 친정어머니가 애써 옛날 법도대로 가르치지 않아도 요즘 아이들은 자기들 입맛대로 잘해 먹고 잘산다. 잘한다, 잘한다, 칭찬하면 더 잘한다.





2012년 3월 30일 자

조선일보 오피니언에 실린글

2015 <<논어 에세이 빈빈>>



류창희 

http://rchess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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