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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에세이, 빈빈

화, 꽃차로 피워내다


불천노 불이과(不遷怒 不貳過)


 


남자들이 뿔났다.

 

내가 담당하는 ‘고전의 향기’ 반의 풍속도가 그렇다. 그냥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는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질문의 내용도 풍류나 해학 쪽이 아니고 도전적인 태도로 즉각 대답하기를 요구한다. 마음의 여유가 각박해졌다는 이야기다.

 

평생교육 프로그램은 입신(立身)을 위한 수업이 아니다. 마음을 수양하는 수신(修身)의 공부다. “공자 왈, 맹자 왈” 선비의 마음으로 느슨하다.

종강 날이 가까워져 오면 강좌가 잘 운영되었나를 살피는 설문조사가 있다. 설문지를 작성하는 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담당 직원이 수업시간에 들어와 15분을 소비했다는 이유로 성질이 급한 어느 분이 화를 내는 사태가 벌어졌다. 처음부터 방화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화는 기름을 부은 듯이 옆 사람에게 옮겨가더니 이참에 잘되었다 싶은지 어느새 논둑의 들불처럼 번져갔다.

 

정녕코,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아닌데 내가 안절부절못한다. 집에서라면 얼른 그 자리를 피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내가 나서서 난감한 분위기를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다. 어린아이처럼 울어버리는 유치한 눈물로 끄기에는 불길이 이미 크다.

 

이런 경우, 여자들은 유연성이 있다. 일단 큰 목소리가 오가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여지를 두게 마련이다. 워낙 가부장적인 남자와 살아온 세월이 여기서도 눌리고 저기서도 눌리고, 하다못해 잠자리에서도 몸무게에 눌렸으니 잘도 참는다. 어디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 보기 싫으면 안 보면 그뿐, 맞서서 이로울 게 없다는 것을 진작부터 안다.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 삭아진다. 기다림이 향기로운 술이 된다는 처세술 몇 독 정도는 다 담가 본 저력이 있다.

 

그에 비해 남자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고지를 점령했던 이들이다. 높은 곳을 바라보느라 발밑이 어두웠으니 날이 갈수록 정수리만 훈장처럼 더 빛난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고 하던가. 추락하는 곳에는 절벽만 있다. 뭐든지 맡겨만 주면 아직 해낼 수 있는 의욕은 가득한데, 어느 틈에 새로운 점령군들이 깃발을 꽂아버렸다. 이정표 없는 길에서 내 발로 내려오자니 자존심이 상한다. 말이 좋아 어르신이지, 가는 곳마다 어르신이라는 단어로 밀어낸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에 돌부리도 내 앞길을 막는 것만 같아 괜한 헛발길질이다.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음이다. “냅네!” 하느라 헛기침을 해보지만, 목에서는 가래만 끓는다. 내뱉는 심정으로 허공에 대고 호령을 해봤자 메아리도 휴식 중이다. 수업시간마다 곧잘 성질을 내던 어느 분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다. 앉았던 빈자리를 바라보며 궁금할 즈음, 왼손잡이가 되어 돌아왔다.

 

화를 내는 일은 인격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화가 날 때, 상대의 뺨을 한 대 후려치면 그 얼마나 후련할 것인가. 그러나 불끈 내지른 화통은 도리어 자신에게 쳐들어온다. 바람이 세차다. 역풍이다. 순식간에 몸의 균형이 깨진다. 화는 ‘중풍’의 전조등이다.

 

내 말이 옳다고 삿대질하던 오른손은 기능을 잃어버리고 글씨도 삐뚤빼뚤 왼손으로 필기한다. 이제 그분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지 않는다. 이말 저말 다 들어도 비뚤어진 입매로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다. 드디어, 득도(得道)의 경지다. ‘달마상’이 되었다. 다가가 슬며시 손이라도 붙잡아 드리면, 그예 참았던 눈물을 손등으로 꾹꾹 찍어낸다. 그런 분들이 어디 한두 분인가. 차라리 벼락같이 화를 내던 그 모습이 그립다.

 


애공이 “제자 중에서 누가 가장 배우기를 좋아합니까?”하고 묻자, 공자 가라사대. “안회가 배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과실을 두 번 거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어, 지금은 없습니다. 그 후로는 그만큼 배우기 좋아하는 자가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 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 옹야편)

 


동쪽에서 뺨 맞으면 서쪽에 가서 분풀이해야 직성이 풀린다.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불천노, 불이과’를 하겠는가. 그래서 사람이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화(鬱火)의 불꽃은 뜨겁다. 열 받으면 열자(列子)가 되어야 한다.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비우고 뱃속을 비워야 한다. 허심(虛心)사상으로 산책하듯 여생을 즐길 일이다.

 

그럼, 그렇게 잘난 척 말하는 너는 어떤가. 나, 나도 발끈발끈 화딱지가 뒤집힌다. 머리끝까지 화가 차오른다. 그러나 예전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푹푹 증기를 뿜어내지는 않는다. 화를 손님처럼 맞아 살살 비위를 맞춘다. 화로에 물주전자를 올려놓고 작은 병 속의 잘 말려놓은 국화 장미 진달래 매화 소화… 어느 꽃을 먼저 피울까 궁리한다. 따뜻한 물속에서 피어나는 꽃의 자태가 곱다. 그동안 참고 견디어낸 세월의 눈과 비, 바람, 추위, 더위… 저마다 수신(修身)의 색과 향을 피워낸다.

 

이열치열이라고 했던가. 나는 화(火)가 나면 화(花)차를 우려낸다.

 

 

 


* 2011, 에세이부산 10집 수록

* 2015 <<논어에세이 빈빈>> 수록


류창희 

http://rchess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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