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집어의 (吾執御矣)
“위대하다, 공자여! 박학하였으나 이름을 낸 것이 없구나.” 달항 사람들이 당시 소득 없는 인문학을 하는 공자를 빗대어 빈정대는 말이다. 공자께서 그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그래, 내 무엇을 전문으로 잡아야 하겠는가? 마부를 할까? 아니면 활 쏘는 일을 할까? 나는 마부가 되겠다.”
(達港黨人 曰 大哉 孔子 博學而無所成名 子聞之 謂門弟子曰 吾何執 執御乎 執射乎 吾執御矣 - 자한편)
그래, 내가 무슨 일을 할까? 운전대를 잡을까? 펀드를 할까. 로또를 살까. 나는 차라리, 대리운전을 하겠다고 제자들 앞에서 공자가 한탄하는 장면이다.
어쩜 엄마는 전생에 내 딸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부산으로 시집오던 날, 엄마를 떼어버렸다. 그래도 일 년에 한두 번 친정 나들이 때마다 엄마는 서울역에 배웅을 나오셨다. 친정에 잠시 다니러 간 사이에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 모임에도 엄마는 언제나 내 꽁무니를 쫓아다니셨으니, 차만 타면 쌩하니 달려오고 싶었다. 엄마는 입장표를 끊어 차가 떠날 때까지 차창 밖에 서 계셨다. 당당하지 못하게 눈물을 훔치며 눈이 벌게지도록 우셨다. 부산에 오면 전화로 “모질고 독한X” 넌 울지도 않더라고 했다. 내가 대전쯤 떨어진 거리에서 속으로 울음을 삼키다가 설움에 얹히는 것을 엄마는 모르셨다. 직장 동료들이 결혼하면서 ‘너처럼 엄마를 좋아하는 딸을 낳고 싶다.’라고 했던, 나는 엄마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
어릴 적, 엄마의 캐릭터는 ‘박복한 년’이었다. “서방 복 없으면 자식 복도 없다”는 말씀을 후렴구처럼 외셨다. 내가 태어나서 엄마의 팔자가 그리되었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원죄설에 걸렸다. 늘 엄마 곁에서 절절매며 숙명처럼 엄마를 돌봐야 했다.
나 없으면 혼자 길음동 육교도 건너지 못할 거라는 걱정과는 달리 엄마는 씩씩하게 홀로 서기를 하셨다. 남과 맞서 싸울 줄 모르는 엄마는 장사 같은 것은 생각도 못 하고 국수 공장이나 스테인리스공장을 다니면서, 동네의 반장이나 통장 노릇도 하셨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빌딩청소일을 시작하셨다.
내가 연년생 아들 둘을 업고 안고 친정에 가면, 길음동 꼭대기 막다른 골목집 파란 철 대문은 늘 잠겨 있었다. 낮에 서울에 도착하면 나와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 나는 엄마가 일하는 남대문 시장 앞 ‘L사옥’으로 갔다. 빌딩 탕비실에 가서 엄마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다른 아주머니들이 잠시 쉬러 들어오면 요구르트와 빵을 나눠 드리며 아무개 아줌마 딸이라고 인사를 했다. 그분들이 묻지도 않는데, 엄마는 우리 딸이 부산서 새마을호를 타고 왔다고 자랑에 신이 나셨다.
그렇게 강산이 두 번 바뀔 즈음, 더는 무릎을 쓸 수 없어 인공관절 수술과 함께 엄마는 생업을 그만두셨다. 딸이 아이 둘을 낳아도 해산바라지 한번을 제대로 못 해줄 정도로 바쁜 중년을 보내셨다. 그 세월 동안 내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고 나도 지금 예전의 엄마처럼 일하러 다닌다. 때마침 방학이라 수술요양차 엄마를 부산으로 모셔왔다.
학부모교육원에 특강이 있어 매일 오전에 나갔다. 12시에 수업이 끝나는데 11시 30분쯤 되면 그때부터 자꾸 전화하신다. “언제 오니?” 다시 시집오기 전 그 시절로 돌아가 아이 보채듯, “올 때, 회 좀 사와라.” 순대나 족발, 치킨 등 주문도 많다. 나는 짜증이 났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도 안 하고 먹는 타령이라니…. 이것저것 장을 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면 시동을 끄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것이 없구나!’ 집에 들어가기 싫다. 엄마의 투정을 들어 줄 귀도, 봐줄 눈도, 맞장구칠 입도 여력이 없다. 부글부글 분한 마음이 치밀었다.
겨우 마음을 추슬러 들어와서는 식탁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소주부터 한 병 딴다. 반주다. 색다른 음식이니 소화를 시키려면 우선 술로 위장 속부터 씻어내야 한다. 오이소박이 속의 새우젓 눈만 봐도 당기는 것이 술이니 어쩌랴. 엄마는 열일곱에 시집와 열여덟에 나를 낳았다. 군에 간 남편이 객지에서 다른 여인과 합방을 했으니, ‘조강지처’란 이름만 있던 엄마였다. 박복한 년의 허기를 채우는 것은 시부모도, 어린 자식도, 꽁보리밥도 아닌, 부엌 시렁 위에서 누가 볼세라 몰래 꺼내 마시는 술이었을 것이다.
저녁 식사시간에 술을 마시면, 술이라고는 제사지내고 음복도 못 하는 사위 앞에서 혹은 외손자들 앞에서 얼마나 눈치가 보이셨을까. 아니, 정작 엄마는 “김 서방도 한잔”하라고 권하지만, 딸인 내가 톡톡 거리며 방어를 하니, 그 또한 민망하셨을 터이다. 엄마가 점심때 나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하다. “엄마, 김 서방 앞에서 술 마시지 마세요.” “엄마, 우리 아이들 앞에서 팔자 타령하지 마세요.” 엄마 품에서 살던 27년 세월을 지워버리고, “엄마, 우린 드라마 안 봐요.” “엄마, TV 볼륨 좀 줄이세요.” 엄마, 엄마, 또박또박 부르며 엄마를 가르치려 들었다.
두어 달 머무시는 동안, 모녀관계가 서먹하기 이를 데 없다. 만약에 고부간이라면 지켜야 할 도리가 있으니 참고 양보한다지만, 모녀간은 솔직한 감정대로 표현하니 서로 서운함만 쌓였다.
엄마는 수술부위가 쾌차하여 부산을 떠나면서 말씀하셨다. “넌, 예전의 내 딸이 아니다.” 네가 밖에 나가 사람들한테 뭘 가르치고 돌아다니는지 몰라도 “네가, 너무 훌륭해졌다.” 나는 네가 자랑스러울 때가 있었다. 내가 빌딩 계단에 엎드려 금색 신쭈(놋쇠)를 수세미로 광내고, 마대걸레로 복도를 닦을 때, 너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맨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엄마, 나 왔어요.” 환하게 웃곤 했었다. 그때 “내 딸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자랑스러웠다.”고 하셨다.
지금, 나는 무엇을 잡을꼬? 칠판 앞에서 분필을 잡을까, 마이크를 잡을까. 엄마는 차라리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신다. 나는 요즘 사람들 앞에서 논어를 강독하고, 글을 발표하면서 고상한 척 ‘안다이박사’ (博物君子) 노릇을 자주 한다. 나의 엄마는 평생, 누구의 부인, 누구의 사모님, 누구의 아내로 살지 못했다. 호미 들고, 행주 들고, 걸레 들고, 대형청소기를 힘겹게 돌리며, 지켜온 ‘어미’의 자리이다. 그 자리를 주눅이나 들게 하는 나는 못된 딸이었다.
삶은 달걀을 까 놓은 듯 피부가 남보다 유난히 고았던 우리 엄마. 꽃다운 시절 엄마가 세파에 시달리지 않고 할 수 있었던 일은, 뭇사람들 시선에서 벗어나 엄동설한에도 새벽 버스를 타던 일이었다. 딸아, 참으로 위대하다! 너는 널리 배워서 무엇을 얻으려는가. 공자처럼 지성선사(至聖先師)가 되려는가. 명예를 얻으려는가. 부를 얻으려는가. 차라리, 봄볕에 나가 쑥을 한 바구니 뜯으면 뱃속 따뜻하게 쑥국이나 끓여 먹지.
어느 사람은 논어로 수필을 쓰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성인의 말씀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나 같이 부박한 사람이 어찌 깊은 학문을 쓰겠는가. 공자님 말씀을 내 눈높이에서 읽으며, 내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진정한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이 내 것이다. 부끄러운 상흔이 드러나더라도 나는 나다.
<<논어 에세이, 빈빈>> 2015
<<에세이부산>>2014
류창희
http://rchess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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