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막학부시 (何莫學夫詩)
나는 팔방으로 연필 춤을 추었다. 내 글을 누군가가 읽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문학이 무엇인지 모르고 ‘내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시원함으로 목소리를 냈다. 나의 기쁨과 설움과 섣부른 자랑과 치부를 드러냈다. 순전히 내 흥에 겨워 사방 뛰기를 했다. 숙성시킨다거나 퇴고라는 말이 있는 줄도 몰랐다. 아침에 건져 올린 생각을 오후에 우체국에 가서 보내곤 했다. 가장 먼저 이름을 불러준 곳이 대구였다.
대구는 본래 덥다는데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대구교대에서 신인상 시상식이 있었다. 대구가 초행인지라 마침 부산대학교 국어국문과에서 정년퇴직하시고 향리 대구에 내려가 계시던 이동영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그날 아침 선생님 댁으로 찾아뵈었다. 허리에 소변 통을 차고 투병 중이셨는데, 다른 거라면 몰라도 ‘문학’은 내가 안내해야 한다며 한사코 시상식장까지 동행을 해주셨다. 마치 당신의 일처럼 기뻐하셨다. 수상소감을 말하면서, 잠시 아주 잠깐, 이 자리에 이동영 선생님이 함께 자리해주셨다는 말을 했더니, 앞자리에 베레모를 쓴 원로문인들이 선생님을 환영하셨다. 또 어느 분들은 이육사의 후손이라며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토정비결 속의 ‘동쪽에서 나타나는 귀인’처럼 희망의 만남이었다. 나는 제도권에서 잘 갖춰진 학력이 없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이끌어줄 스승이 없다. 그런 나를 <세시풍습>이라는 글 한 편을 써 갔을 때 ‘퇴계학 부산연구원’ 편집위원으로 위촉해주셨다. 그로부터 근 20년을 나는 연구원 편집일을 맡고 있다.
그때 나는 몇 군데 시립도서관에서 명심보감과 소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요즘도 고전강의를 하나?” 물으셨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앞으로 문학을 계속할 건가?” “예, 글을 쓰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선생께서 나의 눈을 바라보시면서 아주 짧고 단호하게 “류선생, 문학을 하려거든 ‘논어(論語)’를 읽으시게.”라고 하셨다. 나는 마음속으로 의아했다. 혹시, 시경이나 고문진보라면 몰라도 ‘내가 무슨 철학 하는 사람인가, 정치하는 사람인가? 하필이면 논어를 읽으라고 하시지.’ 생각하며 흘려버렸다. 논어가 문학인 줄 짐작도 하지 못했다.
공자, 가라사대. “그대들은 왜 시(詩)를 공부하지 않는가? 시는 사람에게 감흥을 돋우게 하고, 모든 사물을 관찰케 하며, 대중과 함께 어울리고 즐기게 하며, 은근히 정치를 풍자하기도 한다. 가깝게는 부모를 섬기고, 멀게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시에서 배울 수 있다. 또 시를 통해 새나 짐승 〮• 풀 •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배우게 된다.”
(子曰 小子 何莫學夫詩?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羣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 양화편)
여기서 시는 문학이다. ‘시라는 것은 뜻을 표출하는 것이다. (詩者志之所之也)’ 《시경(詩經)》의 서문이다. 시는 순화된 말로 표현된 문학예술의 결정이다. 문학을 하면 고대인의 생활과 풍습, 정서와 사상, 이해와 득실, 종교와 신앙 등을 폭넓게 알 수 있다. 더불어 자연이나 만물의 현상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늠할 수가 있다. 그 당시, 나는 선생님의 깊은 뜻을 몰랐다.
시상식 당일 날, 나는 뒤풀이 행사로 선생님을 배웅하지 못했다. 내 순서가 끝나자 슬그머니 나가셨다. 그것이 마지막 선생님 모습이다.
그 후,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 나서야 나는 강의 과목을 ‘논어’로 바꿨다. 그 후 벌써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세월이다. 연고도 없는 부족한 나를 늘 애정 어린 눈길로 챙겨주셨었다. 나는 걸음마부터 시작했다. 뒤뚱거리며 제 발걸음에 제가 걸리는 오자 걸음을 걷고 있다. 그 모습이라도 지금까지 지켜봐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계속 글을 쓰는 것도 수필집을 낸 것도 모르시고 먼 곳으로 가셨다. 지금 부산에서 시민들과 ‘논어 에세이’ 강독을 하는 줄 아신다면 아마 누구보다 나를 기특하게 여기셨을 것이다.
나는 울었다. 한국학 교수 정민 선생의 <스승의 옥편>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스승이 계신 제자가 부러워서 울었다. 공부하면서 힘들 때, 나는 어디다 물을 곳이 없다. 자전을 보면서도 까마득하다. 그럴 때면 흉허물없이 여쭤보고 답해주실 스승이 그립다. 누군가의 응원을 받고 싶다. 어느 해부터 나는 스승의 날이 되면 아침 일찍부터 전화를 한다. 내가 나를 위로하는 의식이다. 스스로 스승 만들기 프로젝트다. 나에게도 “이 옥편은 너 밖에 줄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계셨으면 좋겠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시(문학)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다만 살아가는데 조금 위안이 될 뿐이다.’ 문학이라는 장르 안에서 위안을 받고 싶다. 안동의 ‘육사문학관’에 가면 <故 實軒(실헌) 이동영 선생>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우리의 세시풍습에서 재어춘(在於春)이라 하여 정월을 봄이라 하였다. 아직 춥기는 하지만 정월을 봄으로 보고 지혜가 있는 사람을 으뜸으로 여겨 동지섣달은 스승 찾기에 분망한 달이라고 했다. 선생께서 말씀하신 “문학을 하려거든, 논어를 읽으시게”라는 말을 되새기며 문득, 선생님 영전에 ‘논어 에세이’를 국궁하여 올리고 싶다.
들녘은 아직 삭풍이다.
<<논어 에세이, 빈빈>>
류창희
http://rchess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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