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

산앵도나무여! <평론>

신역사주의적 텍스트 : 류창희의 <산앵도나무여!>



박양근(문학평론가, 부경대학교 교수)




류창희는 <논어>를 강독한다. <논어>는 중국 최고의 인문학자인 공자의 가르침을 적은 책이다. 나아가 <논어>를 강독하는 사람은 “사모관대와 의관을 갖춘 남정네”라야 하고 치마를 두른 아녀자는 논어를 가르칠 수 없다는 역사를 고수한다. “젊은 여자가… ”라는 남성중심 사고를 해체하여 <논어>의 텍스트성을 재정립하려는 작가가 류창희다.

 

텍스트와 달리 텍스트성은 변화를 전달 한다. 텍스트가 고수해온 담론과 분위기를 바꾸는 경향이 온 담론과 분위기를 바꾸는 경향이 텍스트성이다. 논어의 자구(字句)를 새롭게 해석하여 사대부의 문화 의식을 해체하려는 류창희의 글쓰기에는 우연 이상으로 신역사주의적 일면이 깔렸다. 

 

신역사주의에서는 지배 구조에서 주목받지 못한 문화 양식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중시한다. 문학 텍스트와 비문학 텍스트를 나란히 세워 문학 텍스트가 지켜온 독점적인 특권을 거부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를 읽으면서 <대화론>의 전통을 거부하고 <논어>를 읽으면서 공자의 영토에서 벗어나는 셈이다. 류창희의 방식도 텍스트에 초점을 맞추는 해석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신역사주의적 해석을 따른다. 그의 방식은 루이스 몬트로스가 말한 “역사의 텍스트성과 텍스트의 역사성”에서 텍스트의 역사성에 해당한다.

 

류창희는 <논어>를 가르치려고 비논어 적인 자료를 동원한다. 그 이유는 <논어>에는 동서고금에 통용되는 텍스트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한한 건 어떻게 2천5백년 전 춘추전국시대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리도 똑같은지. 달라진 건 벡스코(BEXCO)빌딩,, 매트로 아파트, 자동차, 컴퓨터, 휴대전화기 등을 만드는 첨단적인 기술일 뿐, 사람 사는 이치나 마음의 씀씀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치도 변한 것이 없다.


류창희는 “이치나 마음의 씀씀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라고 말한다. 춘추시대와 현대가 동일하는 견해는 비논어적인 자료의 유익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신문, 라이오, TV드라마, 또는 시장터에서의 사람의 대화를 고전문학에 결합시켜 새로운 해석을 펼쳐낸다. 그의 수강자도 ‘먹물 색이 진하게 남아있는 어르신’보다는 불혹의 나이를 넘긴 시민이 대부분이다. 나가가 신역사주의가 다루는 글은 과거와 현재를 치환하듯이 류창희는 자신의 강의를 ‘수다 논어’라고 부른다.


“공자님 말씀이 재미가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꼭 우물가가 아니더라도 나는 “자~왈~” 잇달아 앵두꽃을 피운다. 고리타분하고 촌스럽다고 말하는 공자님의 말씀도 시대에 맞게, 또 내 생활에 맞게 재해석을 한다. 이름하여 ‘수다논어’이다.


고전문헌에 “앵두 꽃을 피운다”는 표현은 환유에 해당한다. 앵두꽃이라는 환유는 춘추시대의 공자를 IT시대의 인물로 전이시키는 효과를 준다. 역상의 해석은 상황에 맞게 새롭게 이루어진다는 신역사주의적 관념에서 보면 문학 텍스트를 이해하는 수단도 고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독자와 작가와 사회 관습이 상호 작용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류창희가 “당체지화(唐棣之華)를 ”산앵두나무여!“라고 부름으로써 독자는 새로운 안목으로 과거의 문헌과 역사를 새롭게 풀이할 수 있다.

 

 

 


* <<에세이문학>> 2010년 봄호에 실린 평


류창희 

http://rchess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