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논어 에세이, 빈빈

감성, U턴하다


사십, 오십 (四十五十)


-루시모드 몽고메리의 『ANNE』을 읽고

 


 


‘앤셜리’호를 타고 책 속의 여행을 떠난다. 초록빛 나무들과 잘 익은 과일들이 있는 마을의 오솔길, 캐나다 세인트 프린스 에드워드 섬. 그곳에서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어릴 때, 빨간 머리 앤에게 한 번 정도 빠지지 않고 자라난 여자아이들이 있을까. 책을 읽다가 문을 열어놓고 자면 앤이 문밖에서 자꾸 기웃거린다. 밖으로 나와 물 한잔을 마시고 들어가면 앤은 문앞에서 또 재잘거리며 채근 댄다. 때론 말이 너무 많아 멀미가 날 지경이다. 하지만, 앤의 감성에 감염되면 이튿날 아침 늦잠을 자야만 했다.

 

『ANNE』의 작가 루시모드 몽고메리 (1874-1942), 그녀 또한 소설 속의 주인공인 앤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다. 고지식하고 급한 성격의 외할아버지와 감수성이라곤 없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른이 되고 나서 루시모드는 이런 허세를 그린게이블즈 ‘빨강 머리 앤’으로 그려낸다. 앤은 모드의 자전적 소설일 수밖에 없다. 캐나다의 애번리 마을에서 매슈와 그의 누이 머릴러가 농사일을 위해 사내아이를 입양하기로 하지만, 착오가 생겨 여자아이가 오게 된다. 빨강 머리 앤은 수다쟁이에다가 엉뚱한 상상을 즐기는 천진난만한 소녀다. 낯선 환경에서도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적응해 간다.

 

앤은 연필을 깎기도 하고 책상 속의 그림카드를 정리하기도 하면서 꽃처럼 피어났다. 매슈는 앤이 무슨 말을 하든 “그럴 테지.” 들어줌으로써 앤의 상상력을 도와준다. 머릴러는 앤이 늘 작은 공작새처럼 으스댄다며 언제나 변함없이 아무 장식도 없는 수수한 옷을 만들어 입힌다. “그 이야기인지 뭔지를 쓴다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은 없을 게다. 책을 읽는 것만도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데 쓰기까지 하다니…” 머릴러는 앤의 상상력을 곳곳에서 가로막으며 물질이든 정신이든 허영에 들뜨지 않도록 이끌어준다.

 

머릴러의 목소리가 꼭 지금의 내게 하는 말처럼 와 닿는다. 나는 글을 쓸수록 감성이 풍부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감성이 마른 표고버섯처럼 쩍쩍 갈라지는 것을 느낀다. 마음이 건조하니 곁에 있는 가족들의 마음까지 긁을 때가 많다. 지켜보던 남편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던지 무거운 택배로 선물을 보내왔다. 빨강 머리 『ANNE』앤이었다. 아내에게 주는 선물치고는 장난스럽다. 마음이 봄물처럼 촉촉하게 차오르는데 큰아이는 덩달아 “어! 누가 엄마캐릭터를 보내왔어요?” 한 술 더 뜨며 부추긴다.

 

『ANNE』을 읽는 동안 내내 행복했다. 우리가 애니메이션 동화로 아는 내용은 각 권 오백 쪽 분량의 10권 시리즈 가운데 제1권이다. 루시모드는 다른 이들의 인생을 밝게 그린다. 유년부터 노년에 이르러 영원히 잠드는 순간까지 태양처럼 밝게 비춰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루시모드에게 ‘글쓰기’란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가장 미혹되고 싶은 나이가 사십이 아닌가 싶다.

 


공자, 가라사대. “나이 사십이 되어도 나쁜 마음이 나타나 보인다면 더 볼 것이 없다.”

(子曰 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 - 양화편) 

“나이 사십 오십이 되어도 무언가 잘한다는 소문이 없으면 후학들이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 자한편)

 


 

『論語』에서 공자가 두 번 세 번 말하는 사십이나 오십이라는 나이의 지칭은 아마도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는 예시의 숫자일 것이다.

 

오월의 꽃은 지난여름에 피었다가 시든 꽃의 넋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 오월에 머물고 있다. 화양연화 5구간 9번 출구 앞에 서 있다. 멈칫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려야 할 곳을 놓친 것도 같고 더 가야 할 것도 같다. 진작에 지명(知命)의 세월을 맞이하고도 길모퉁이에서 서성인다. 

 

여태까지 나는 내가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요즘 나는 어설픈 잣대와 저울추를 들이대고 사람들의 장단과 경중을 재고 있는 내 꼴을 본다. 이런 내 모습이 낯설다 못해 겁이 난다. 나 자신이 나에게서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인동초(忍冬草) 꽃을 머리에 꽂고 정신을 향기롭게 하고 싶다. 앤처럼 나는 아직도 철이 없는지 예쁜 원피스를 보면 사고 싶어 눈앞에 아른거린다. 흰머리 소녀가 되어서도 제비꽃 풀꽃 반지를 끼고 멜빵이 달린 긴치마와 소매를 부풀린 흰 블라우스, 그리고 프릴달린 앞치마 마련에 공을 들인다. 그러나 그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의 꿈을 언제 제대로 펼칠 것인가. 앤과 같은 긍정적인 상상의 나래를 펴고 싶으나 이미 머릿속은 칡넝쿨과 등나무로 갈등을 겪고 있다. 레이스 하늘거리는 ‘풀꽃 소녀’는 어디로 가고 고무줄 바지의 ‘와락 여사’로 점점 목소리만 크다.

 

그중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렵다. 남에게는 너그러운 척해도 정작 보잘것없는 내 자존감을 지키려고 바늘귀구멍만큼의 틈도 주지 않는다. 착해 빠져서 조금 덜떨어진 사람, 조금 모자라는 사람으로 살면 또 어떤가. 이제 더 얻고 더 잃을 것이 무엇인가.

 

오직, 앤셜리의 감성으로 돌아가고 싶다. 마음의 고향, 그곳이 너무 멀어지기 전에 돌아가자. 지금, 『ANNE』을 읽는 것은 나에게 방향제시 등(燈)과 같다. 신호가 깜빡이는 여기가 바로 감성의 U턴 지점이다.

 

그동안 내가 어줍게 추구하던 허세의 깃발을 내리자. 싱그러운 유월의 숲으로 들어가 앤의 감성으로 낭만을 즐기자. 진한 술 한잔으로 건배할 수 있는 벗이 내 낭만의 손님으로 찾아왔으면 좋겠다.


 


 


* <<현대수필>> 2010 여름호 에 실린 글

*<<논어 에세이 빈빈>> 2015


류창희 

http://rchessay.com


'논어 에세이, 빈빈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날의 금잔디  (0) 2017.02.19
손을 말하다  (0) 2017.02.19
산앵도나무여!  (0) 2017.02.19
퇴계의 향기를 찾아서  (0) 2017.02.19
들키고 싶은 비밀  (0) 2017.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