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향기를 찾아서
추로지향 (鄒魯之鄕)
안동의 군자리, 기와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국인물 반재영남 영남인물 반재안동’ (東國人物 半在嶺南 嶺南人物 半在安洞) 동국의 인물 중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물 중의 반은 안동에 있다고 했다던가. 살림은 가난해도 도덕만은 풍부한 곳, 학문과 예절이 바르고 어진 선비와 명현 석학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안동은 선비의 고장이다. 퇴계는 산수를 남달리 사랑하였다더니, 오류선생(五柳先生)의 ‘귀거래사’ 병풍이 겹쳐 보인다.
산자락에 산수유와 진달래가 한창이다. 멀리 보이는 정자, 소나무 숲에 쌓인 시사단(試士壇)이다. 당시 영남 일대의 유생 7천여 명이 호수 가운데로 배를 타고 들어가 시험을 봤었다고 한다. 봄 가뭄으로 안동댐이 바짝 말라 곳곳이 쩍쩍 갈라져 있다. 산천은 메말라도 분명히 봄은 와 있었다.
서원의 입구 ‘鄒魯之鄕(추로지향)’ 표지석이 반긴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태어났던 성현들의 고향처럼 유학(儒學)의 터전이라는 뜻이다. 공자의 77대손인 공덕성(孔德成)선생이 도산서원을 방문했을 때에 남긴 휘호라고 한다.
1. 도산서원
퇴계가 거처하던 온돌방을 완락재(完樂齋)라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마루방을 암서헌(巖栖軒)이라 한다. 완락재와 암서헌은 각각 주자의 명당실기(名堂室記)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 옆에 농운정사(隴雲精舍)는 제자들이 생활하던 공간, 요즘으로 치자면 기숙사다. 퇴계는 언제나 지식보다 생활과 실천을 가르쳤다고 한다.
우리 <퇴계학 부산연구원> 일행은 전교당(典敎堂)에서 폐백을 드리고 상덕사(尙德祠) ‘退陶李先生(퇴도이선생)’을 주향(主享)으로 월천조공(月川趙公)을 종향(從享)으로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들어갔다. 사당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와 부정한 사람과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을 출입시키지 않던 신성한 곳이다. 전교당의 유사가 대표로 남자 세 사람만 관복을 갖추게 하고 여자인 나는 들어서지 못하게 했다.
본래 알묘(謁廟)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가 아무나 인가. 퇴계학 부산연구원의 원보 지령 100호 기념으로 퇴계 종손의 취재를 맡은 편집위원이 아니던가. 그분은 아직도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에 갇혀 있는 듯하다. 오히려 내가 실무자고 높으신 분들이 나를 도우러 함께하신 것을 모른다.
여기까지 와서 알묘를 못할 수는 없다. 아마 지금 퇴계선생이 살아 계셨더라도 분명히 나만은 따로 들어오라 하셨을 것이다. 430여 년간 지켜온 금녀의 벽. 퇴계탄신 500주년 기념식에 찾아온 공자의 후손인 공덕무여사도 거부했던 곳이란다. ‘선비문화체험연수’가 아닌, 유림(儒林)의 당당한 자격으로 연두색 원삼(圓衫)예복에 화관을 쓰고 퇴계선생을 알현했다. 이렇듯 역사는 흘러가고 예는 시대에 맞게(時中) 변화하는 것이다. (남자는 청색 관복과 검은 사모를 쓴다.)
진설 직전 홀기(笏記)대로 제수를 장만하는 전사청과 퇴계의 문집을 출판하는 장판각(藏版閣), 퇴계가 생존 시에 사용하던 매화벼루, 흑색벼루, 매화 꽃등, 연갑 등등 유물들을 전시해놓은 옥진각(玉振閣)을 두루 돌아 나오며 퇴계의 아취(雅趣)를 흉내라도 내고 싶은 마음으로 설렌다.
2. 퇴계묘소
중국에 공맹(孔孟)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퇴계가 있다.
예장(禮葬)을 하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다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만 쓰고 뒷면에 간략하게 향리와 조상의 내력과 지행과 출처만을 새기도록 한 담백한 유언에 덧붙여, “매화 분에 물을 주어라.”라고 하시고 돌아가셨다는 퇴계 묘소답게 봉분과 비석이 소박하다.
송(宋)나라의 임포가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같이 여겨 매처학자(梅妻鶴子)라 했다고 한다. 퇴계선생은 매화는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한불매향’(梅寒不賣香)이라 하며 매화를 매형, 매선, 매군으로 마치 가족처럼 친근하게 여겼다고 한다. 어쩌면 선생에게 매화는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특히 매화를 사랑하여 평생 매화 시(詩)를 지은 퇴계선생이시다. 그렇다면 매화처럼 맑고 향기로운 여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셨을까. 마침 묘소 앞에 싱싱한 꽃다발이 놓여 있다. 이 이른 아침에 누가 놓고 갔을까. 얼핏 꽃다발에서 한 여인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하다. 혹시, 퇴계만을 섬기고 사랑하며 종신 수절하였다는 그녀는 아닐는지…. 나는 일찍이 ‘무불경(毋不敬)’을 배웠건만, 하필 조심스럽지 못하게 이런 곳에서 왜 ‘두향’이가 떠오르는지…. 하지만 퇴계에게 그런 운치조차 없었다면 문향(文香)을 어이 떨쳤겠는가. 오백 년 세월을 넘어 퇴계를 한 사람의 문우(文友)로 만난다.
퇴계의 묘 바로 아래 선생의 맏며느리 금씨부인(琴氏夫人)의 무덤이 있다. 나는 묘 앞에 머리 조아리며 선생의 인간적인 따뜻한 숨결을 엿본다. 당시 세도가였던 금씨의 집안에서 퇴계를 사돈으로 맞이한다. 퇴계가 금씨 집안에 방문했을 때, 가세가 빈한한 선생이 앉았던 자리를 미천하다 하여 물로 씻어내고 대패로 밀어냈다고 한다. 그 수모를 탓하지 않고 혹시 며느리가 민망해하기라도 할까 봐 며느리에게 더욱 따뜻하게 대해주어 사후에도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있다고 한다. 효부(孝婦)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만드는 것이리라.
3. 종택과 종손들의 근황
바닷가에 사는 것이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이 시냇가에 사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퇴계는 말년에 고향 시냇가에 한서암(寒棲菴)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후학들과 함께 학문에 몰두하셨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퇴계종택(宗宅)을 불 질러버렸다. 지금 종택은 80여 년 전, 13대 종손이 지은 것으로 솟을대문과 ㅁ자형 정침이 있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으로 이루어졌다.
15대 손인 이동은 옹(翁)(1909년 기유생)과 16대손 이근필선생(1932년 임신년), 17대 손인 이치억씨(1975년 을유년)와 종손 손부인 이주현씨 부부가 아들 이이석(2007년 정해생)을 낳아 4대가 한집안에서 살고 있다. 세속을 버리고 은사(隱士)답게 조용하게 살다간 퇴계의 모습인가. 이동은 옹(翁)은 백수를 넘긴 자태가 학같이 고우시다.
98년도에 부산퇴계학연구원의 여성회 일을 맡아 폐백드리러 왔었다며, 내 수필집《매실의 초례청》을 드렸다. <매실의 초례청> 글 속에 퇴계선생의 시를 인용하여 ‘현대 수필문학상’의 문운이 스몄다고 말씀드렸더니, 백 세가 넘으신 옹께서는 작은 수첩을 꺼내 화답으로 시 한 수를 읊으신다.
‘금 같은 세월을 100년이나 허비하여 억울한데,
내 맘의 부끄러움은 또 한 해를 더 하는구나!
효도하고 자애하는 덕목을 지금부터 시작하고
우리나라 만년을 또 만년을 이어가면 얼마나 좋으리’
꼿꼿하게 앉아 절 받으며 수첩에 손수 적은 작은 글씨를 소리 내어 읽는 모습, 눈 밝고 귀 밝고 청아한 목소리에 마주앉은 내 마음도 흐뭇하다. 어른들을 잘 모시는 자손들의 정성이 옹(翁)의 모습에서 보인다. 퇴계의 정신을 오롯이 온몸에 담고 계신 옹의 두 손을 꼭 잡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장수하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방에서 나왔다.
대청마루에서 차 종손 근필 선생이 ‘造福譽人(조복예인)’ 이라는 휘호를 써 놓고 기다리신다. 성품이 옥같이 맑고 깨끗하여 어느 때고 남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는 퇴계의 모습, 차 종손 어른에게서도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 대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서원의 풍경 속에 그림처럼 자연스럽다.
“퇴계학연구원에서 할아버지를 높여주시는 덕분에 너른 집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어 황송할 따름이다.”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신다. 정령, 그렇기만 했을까. 온통 세상은 물질문명으로 첨단을 걷고 있는데, 선비의 정신을 담은 전통가옥에서 가문의 예절을 지키며 백수의 아버님을 모시고 아들 며느리에게 가르쳐야 하는 책임이 그 얼마나 막중할까. 우리의 무형 유형의 문화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삶이 고되고 외로우셨을 텐데도 ‘신기독(愼其獨)’ 그 홀로 삼가는 모습을 바로 숭덕(崇德)으로 보여주신다.
나 혼자 종가 안채로 들어갔다. 부인들이 거처하는 깊은 곳이라 하며 남자 분들은 밖에서 기다리셨다. 뜰 안에 장 항아리가 종갓집의 위엄을 나타내듯 그득하다. 여염집의 맏며느리만 해도 하늘이 낸다고 하는데, 어찌 퇴계가문의 종손부로 시집을 왔을까. 내 딸이라도 내 며느리라도 어렵기만 한 자리다. 그 자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 살배기 이석, 종손부 주현여사, 차 종손 근필 선생 삼대의 도란도란 손님맞이 모습이 정겹다.
종택의 종부 역할을 어떻게 다 치러내느냐는 나의 물음에 “퇴계 선생 제사만 크게 지낸다.”라며, 다른 제사가 의미가 덜하다는 것은 아니라며 허세와 낭비를 지향하고자 제관의 수에 맞춰 제수(祭需)를 준비한다고 했다. “저는 퇴계 종가의 종부라는 막중한 임무가 있습니다만, 그일 만큼 중요한 것이 육아입니다.” “아이 때문이 아니라면 집안 대소사나 제사에 다 참석을 합니다.”라고 하는 말 속에는 종손부의 굳건한 의지와 부덕(婦德)이 배어 나온다.
“할아버지와 아버님이 잘해주시고, 서울에서 공부하는 남편 역시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라고 차근차근 말한다. 이제 서른 남짓한 나이이다. 시어머님이 안 계신 큰살림을 살며 방문객들의 접빈례(接賓禮)와 두 어른을 조석으로 모시고 있다. “저에게는 네 분의 고모님들과 작은 어머님이 계시는데, 그분들께서 큰 힘이 되어주십니다. 말씀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틀림이 없는 훌륭한 분들이라 잘 받들어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친정어머님은 걱정이 많으시겠다고 하니 “제가 큰일을 잘해낼지 늘 걱정하신다.”라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다. 해맑게 웃는 모습에 오히려 내 마음이 애잔하다. 아린 상처이기보다는 저린 감동이다. 이 글을 쓰면서 퇴계 선생 종손부와의 소통이 내겐 어느 꽃보다 향기롭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배움을 얻는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팔순이 다 되어가는 차 종손 어른이 차 타는 곳까지 나와 우리 일행을 배웅하신다. 남녀가 유별하여 지엄한 곳, 성별이 무슨 장벽인가. 언제 내가 다시 이분들을 찾아뵐 것인가. 나는 차 종손을 두 팔로 꼬옥 부둥켜안았다.
퇴계선생의 태실(胎室)을 돌아 나오는 길, 어디 그곳이 퇴계 종손들만의 고향이며 종손들만의 조상이기만 할까. 그분들이 생활하는 모습에서 극기복례(克己復禮), 즉 사욕(私慾)을 누르고 예절(禮節)을 좇게 하는 정신을 담는다.
매화향 따로 있으랴. 이번 탐방으로 가슴에 품은 유학의 씨앗이 튼실하게 발아하여 만방으로 퍼져 나가기를 기원해본다.
(2009년 부산 퇴계학연구원 소식지 100호 기념 원고)
* <<퇴계학연구원>> 소식지 2009년,
* <<에세이부산>> 제8호 에 실린글
* <<논어 에세이 빈빈>> 2015
류창희
http://rchess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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