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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에세이, 빈빈

들키고 싶은 비밀

 

공자시기망야 (孔子時其亡也)

 

 

얼마든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오히려 그런 프로그램을 한번 진행해보고 싶다는 오만한 기대로 설레기까지 했다. 늘 강의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아왔으니 당연히 의자가 모자랄 것이라 여겼다.

 

강의실로 들어서는 순간, ‘모래성이 보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칠십 대로 보이는 세 명이 더 들어와 다섯 명이 되었다. ‘한 사람, 단 한 사람 앞이라도 열과 성을 다하겠노라.’라는 애초의 생각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나이와 가족관계 등을 물었다. 서로 견제하는 눈빛들만 오간다. 무엇을 소리 내어 말하고 싶겠는가. 혼자 생활하거나 병마와 싸우는 가족이 집에 있는 이들이다. 그중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걸어왔느냐 아니면 마을버스를 타고 왔느냐고. 운전하고 왔다고 하니 그나마 보이던 호기심마저도 에구 기름값도 올랐는데몇 발이나 된다고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도서관 직원들이 나에게 무엇을 부탁할 때 전천우시잖아요맡겨만 놓으면 그런대로 잘 이끌어나간다는 말이. 그러나 나는 지금 소외계층 평생프로그램이라는 이름 앞에 안절부절못하는 또 다른 소외계층이다.

 

다음 주엔 그나마 왔던 사람은 아예 안 오고 새로운 세 명이 다시 왔다. 전화받고 왔다며 뭘 갤킬거냐고 묻는다. ‘명심보감이라고 하니, 우린 한글도 모르는데 뭐 말라죽은 한문이냐며 밥은 언제 주느냐.”고 물었다. 아마 강의를 들으면 밥을 준다고 한 모양이다. 두 시간 동안 진땀을 빼고 나오는데, 산기슭 밑 복지관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보였다. 점심을 먹기 위한 줄이다. 그들에게 오늘의 목표는 한 끼 식사다. 연필과 책 공책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느 분이 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나는 당신의 불우가 부럽다.”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나의 불우는 그 시절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보편적인 불우였다. 더구나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살면서 가난 앞에 주눅이 들었던 기억이 별로 없었으니 분명히 가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는 유복했었던가.

 

그 다음 주에는 스타킹과 구두를 벗어버렸다. 헐렁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맨발에 꽃무늬 얼룩덜룩한 덧버선을 신고 책가방 대신 단술 한 통을 싸들고 갔다. 칠판에 명심보감의 글귀 한 줄 써 놓고 그들과 이야기하며 나눠 먹었다. 어르신 혹은 선생님 호칭을 빼버리고 단디하이소” ‘단디보감으로 들이댔더니 내가 쓰는 사투리가 어설펐던지 웃기 시작했다.

 

늘 일찍 오는 할머니가 있다. 한자를 척척 기막히게 베껴 쓰는 모습이 놀랍다. 슬쩍 물었다. “한문 공부를 많이 하셨나 봐요?” 얼른 두 손으로 공책을 가리며 한글 음으로는 읽을 줄 모른다고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되던 해에 한국에 나와 땅은 어디 갔던지 집도 절도 없이 고생했었다며 옳은 농사꾼도 못되고, 말이 안 통하니 장사도 못 해먹고, 그럭저럭 살다 보니 나이 일흔이 넘어서야 이제 겨우 한글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삼 년을 배웠는데도 아직 철자법이 다 틀린다며 매웠던 세월을 버무려 싱겁게 웃는다.

 

미처 단술을 삭히지 못한 날은 요구르트를 사간다. 수강생 중에 찬 것을 못 먹는 영감님이 있다. 결석 자가 많은 날은 두 개씩 돌아간다. 그런 날 건배를 하면 하나는 마시고 나머지 하나는 따로 주머니에 챙긴다. 나중에 전해 들으니, 집에 있는 손자가 마음에 걸려 찬 것을 못 먹는다고 핑계를 댄다는 것이다.

 

차츰 많은 사람이 가족처럼 친해졌다. 아이를 포대기둘러업고 서서 듣는 새댁, 아이가 칭얼거리면 수업시간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데리고 논다. 노인들도 같이 둥개둥개 둥개야아이를 어른다. 동심으로 돌아간 그들. 그 누군들 녹록한 삶만이 있었을까. 수업시간에 오가던 이야기들. 엇박자로 빗겨간 세월을 아이 따라 울고 아이 따라 웃고, 나도 그들 따라 웃다가 울었다. 반년의 기간이 지나고 어느덧 내가 먼저 까꿍아이를 얼러가며 명심보감을 거울삼아 같이 놀고 있다.

 

그날도 수업하기 전에 요구르트를 사가려고 하는데, 찬 것을 못 자신다는 영감님이 요구르트 가판대 옆에 앉아 당최 움직이지를 않는다. 적은 돈을 내고 생색내는 것 같아 차를 멀찌감치 세워놓고 영감님이 어서 자리 뜨기를 기다렸다. 백미러로 보니 멀리 있는 시선이라 어느 방향을 바라보는지 통 알 수가 없었지만, 꼭 내 차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것 같아 순간순간 눈길을 피했다.

 

그러기를 삼십여 분, 수업시간이 임박해져 온다. 저 영감님은 왜 안 들어가실까. 미묘한 대치상태가 되었다. 팽팽한 긴장감. 수업 5분 전, 할 수 없다. 요구르트 사기를 포기하고 급하게 걸어갔다. 그런데 영감님이 나를 향해 걸어온다. 구부정한 어깨와 듬성듬성한 치아, 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엎어질 듯 빠른 걸음으로 오더니 덥석 내 손을 잡는 것이 아닌가. 움찔했다. 마른 장작개비 같은 뻣뻣한 손에서 빠닥작은 비닐의 촉감이 전해진다.

 

미끄러운 나일론으로 봐서는 분명히 손수건은 아니다. 스카프다. 그런데 가느다란 내 목에도 너무 작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앞 문구점에서 사오던 어버이날 선물처럼 반짝반짝 색상과 디자인이 유치하다.

 

 

양화가 공자를 만나고자 했으나, 공자가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자 양화가 공자에게 돼지를 선물로 보냈다. 이에 공자는 양화가 자기 집에 없을 만한 때를 틈타서 사례하러 가다가 공교롭게도 도중에서 그를 만났다.

(陽貨 欲見孔子 孔子不見 歸孔子豚 孔子時其亡也 而往拜之 遇諸塗 양화편)

 

 

무덥던 여름이 지나갔다. 어느덧, 찬바람이 스산하다. 길가의 노란 은행잎들도 머지않아 다 떨어지리라. 벌써 몇 주째 그 영감님이 보이지 않는다. , 서둘러 들어서는 그의 시선을 놓칠세라 자꾸 문 쪽을 흘끔거리며 수업을 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작은 황금빛 스카프를 목에서 풀지 못한다. 그 영감님에게 내 마음을 들키고 싶기 때문이다.

 

 


 

 


<<논어 에세이 빈빈>>2014

<<에세이 플러스>>2009년 9월호,

 <<북스토리>>2009 문학관 파견사업,

<<부산이야기>>2010년 11~12



류창희

http://rchess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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