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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책 평론] 류창희 론/ 신재기

<류창희의 수필집  '매실의 초례청' >


자전적 고백으로서 글쓰기   


신 재 기 (문학평론가, 경일대학교 교수)

 



류창희의 󰡔매실의 초례청󰡕을 읽고 그의 수필 세계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작가의 다음 발언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수필 쓰기에 관한 작가의 관점과 태도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의 수필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고 하겠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그리움을 만나는 일일 것이다. 그리움은 나에게 어떤 한(恨) 같은 정서를 남겨 주었다. 울컥울컥 그리움을 행간에 써 내려가다 보면 속이 후련해진다. 내 스스로 비위를 맞추면서 나를 어루만진다. 어떤 이는 나를 두고 글에 욕심이 없다고 말한다. 난 아직 남을 위해 보시하듯 글을 쓸 재간이 없다. 어쩌면 쓸 수 있는 날까지 나 자신을 달래고 보듬어 안는 자전적 고백이 될 성싶다. (<그리움은 수묵처럼 번지고>에서) 


이 예문에 나타나는 대로 따르면, 수필 쓰기에 관한 작가의 입장은 네 가지로 정리될 것 같다. 첫째, 자기 작품의 기본적인 미적 정조를 그리움으로 본다. 둘째, 글쓰기의 주된 효용을 작가 자신의 심리적 갈등 완화하는 것에서 찾는다. 이는 자기 치유로서의 글쓰기와 깊은 관련성을 지닌다. 셋째, 독자와 소통 이전에 우선 자신을 드러내는 데 무게를 두는 글쓰기 방법을 지향한다. 문학 표현론의 입장이다. 넷째, 자전적 고백의 글쓰기를 추구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의 수필 쓰기는 ‘자전적 고백으로서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창작 방법상의 태도가 작품에 완벽하게 구현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그의 수필 세계는 이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백의 글쓰기  


앞의 예문에서 보았듯이, 작가는 자신의 수필 쓰기를 ‘자전적 고백의 글쓰기’라고 했고, 앞으로도 이 방법을 견지할 것임을 밝혔다. 그런데 자전적 고백으로서 수필 쓰기는 작가 류창희뿐만 아니라, 모든 수필가에 다 해당한다. 그것은 수필의 기본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필가가 새삼 자신의 글쓰기를 자전적 고백이라고 천명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수필의 기본을 충실히 지키겠다는 다짐인가? 강한 메시지를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가 독자를 감동시키려는 글쓰기보다는 자신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데 온 힘을 기울일 뿐이라는 겸손의 발언인가? 류창희에게 자기 고백으로서 수필 쓰기는 이 같은 의미를 두루 담고 있다고 하겠다. 

 

자신을 고백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고백’은 숨김없이 진실을 모두 말한다는 뜻이다. 반대의 의미는 숨기고 은폐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이 고백이다. 세상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 비밀이다. 그런데 진정한 비밀은 발설하더라도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비밀이다. 해변의 모래 위에 새겨진 흔적이 파도에 씻겨 금방 지워지는 것과 같은 비밀은 비밀이 아니다. 말하면 말할수록,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더욱 깊은 흔적으로 각인되는 것이 진정한 비밀이다. 이런 점에서 비밀은 그 사람의 영혼이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과 같은 것이다. 털어놓을 비밀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의미 있는 존재로서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한 영혼에서는 그 사람만의 인간적인 향기가 솟아난다. 수필을 ‘자기 고백의 문학’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고유한 비밀을 고백하는 것이 수필이다. 내가 경험했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나의 고유한 비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다른 사람도 똑같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이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 되려면 경험을 기억하고 의미화 하는 데 촉매 역할을 하는 그만의 영혼이 있어야 한다. 내 속에 있는, 남이 모르는 사실과 느낌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진정한 수필이 될 수 없다. 자질구레하고 진부한 개인의 비밀을 털어놓는 수준으로서는 좋은 수필이 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류창희는 자기 고백의 수필가다. 그는 말한 것과 같이 고백으로서 수필 쓰기를 충실히 실천해 왔다. 수필은 자기 고백의 문학임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아버지가 그립다. 온화한 마음으로 눈자위의 그늘을 걷어 내고 ‘아버지의 방’을 마련해 드리고 싶다. 아직 마음을 활짝 열어 따뜻한 방을 꾸밀 수야 없겠지만, 그 방을 데울 장작개비를 모아 보자. 속 좁은 소견머리로 여력이 없다면 생솔가지면 어떤가. 잘 타지 않아 매캐한 연기로 눈물이야 나겠지만, 자꾸자꾸 군불을 때다 보면 아버지의 온기를 느낄 날도 있지 않을까. <아버지의 방>에서) 


화자에게 아버지는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사라지는” 존재였다. 아버지가 있었으나 곁에는 늘 부재하여 화자의 마음속에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방’이 없었다. 아버지와 다정한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눈길을 마주친 적도 없다. 화자가 살아온 시간은 아버지 부재의 울타리에서 키워온 슬픔과 원망의 세월이었으리라.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제 마음속에 아버지의 방을 마련하고 싶다. 방만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방안이 이 따뜻하도록 장작으로 군불을 지피고자 한다. 장작이 안 되면 눈물을 삼켜가며 생솔가지라도 때고 싶은 심정이다. 이 같이 아버지를 받아들이겠다는 작가의 마음에는 진한 그리움이 깔려 있다. 지금까지 굳어져 맺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지워버리고 화해하고자 한다. 그것은 실제로 나와의 화해다. 여기서 작가의 아름다운 영혼을 확인하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가슴 아픈 비밀이 작가의 고귀한 영혼과 화합하면서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자신의 비밀을 통해 영혼을 가꾸어 온 것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향기가 풍긴다. 이 대목이 류창희 수필의 고유한 특성이며 빛나는 부분이다. 

 

한편, 그의 수필은 메시지를 담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특정한 기법이나 전략을 동원하지도 않는다. 그는 난초를 화폭에 담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난을 피워 내는 일은 붓 끝에 있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마음을 닦아 자유자재의 열린 마음이 될 때까지, 한 촉 한 촉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난을 치고 있다.”라고 했다. 수필도 난초를 그리는 것과 같은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에게 문학 창작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기술 연마보다는 마음의 닦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유자재의 열린 마음”이 그것이다. 여기서 마음은 영혼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영혼을 갈고 닦는 일이 수필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영혼을 닦음으로써 그것은 자유롭고 열릴 수 있다. 자유롭고 열린 영혼에서 아름다운 비밀이 생성하고, 그것이 수필쓰기의 근원임을 류창희는 간파한 것이다. 

 

 


자전적 글쓰기  


류창희는 자신의 글쓰기를 자전적 고백이라고 했다. 여기서는 ‘자전적’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작품을 읽어보자.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직접 말하는 것이 자서전이고, 자서전적인 요소가 강할 때 자전적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은 장르상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다. 모든 글은 궁극적으로 글 쓰는 이를 드러내지만, 자신에 관해 말하는 가장 대표적인 글쓰기가 수필이다. 수필은 있었던 사실과 실제로 체험한 것을, 허구적인 세계인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필이 일인칭 화자 시점이라는 점도 수필이 자전적 요소가 강한 장르임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앞에서 논의한 ‘고백’과 마찬가지로, 수필이 태생적으로 자전적 성격이 강한 글일진대 류창희가 굳이 자신의 수필을 자전적이라 표방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의 수필에는 가족 이야기가 많다. 가족을 소재로 한 작품이 그의 수필 세계의 한 영역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자전적이라 할 수 있다. 수필가 류창희는 40대 후반에 등단하여 지금까지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간 발표한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것이 이번 수필집이다. 수록 작품에서의 화자는 40대 후반과 50대 초반의 나이에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중년 여인이다. 유학(儒學)을 공부하고, 그것을 주제로 강의도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여건으로 보아 그의 수필이 ‘여성으로서의 삶’에 큰 비중을 두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수필은 삶과 생활의 기록이란 특징을 가장 잘 살렸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전통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으로서 삶’의 대표적인 기호는 가족이다. 한 가족 속에서 여성의 역할은 ‘어머니’로 요약된다. 결혼 전의 친정에서 여성은 딸이다. 결혼 후 시집에서 여성의 삶은 아내와 며느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여성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여성의 자서전이 엮어지는 중심 줄기다. 

 


① 내 어머니는 남편을 외지에 내보내고 층층시하 어른들을 모시고 살았다. 집성촌 풍습이 그러하듯 안팎이 조심할 것 투성이. 그 속에서 남편이 보고 싶어도 맏며느리라는 이름으로 내색도 못하고 나날을 삭이며 살았다. 나는 색동저고리를 입던 열 살 이전부터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면서 살았다. 나마저 돌아누우면 어머니도 떠날 것만 같아 겁이 났다. (<발한>에서)  


② 마음씨·말씨·솜씨·맵시의 부덕을 고루 다 갖추신 어머님은 한 치의 어긋남도 못 본 척 넘기지 못하는 성품이셨습니다. 불호령과 저기압 전선을 만들어 며느리 기강을 바로 잡으셨지요. 어머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늘 조심스럽게 옷깃을 여미며 마음의 보초를 섰습니다. 심신은 고단했지만 운명처럼 그렇게 어머님과 합이 척척 맞았습니다.   (<우담화의 제문>에서)


③ 사춘기의 열정에 휩싸여 열병을 앓고 있을 때였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만약에 직업으로 이어져 부와 명예도 없이 가난한 생활을 할지언정,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만큼의 복됨이 있겠느냐면서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처럼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고 은근히 부추겼다. (<너도 풀꽃과>에서) 


①은 화자가 유년 시절 어머니의 삶을 기억하는 부분이다. 작가는 “작은 산골 마을, 그곳에서 봐 주는 이 알아주는 이 없어도 별을 쳐다보는 풀꽃 닮은 한 소녀”였다. 그가 기억하는 과거는 “아버지 부재중에 울타리 없이 살아온 세월”이었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 부재의 공간은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다. 류창희 수필은 대가족 속에서 남편 없이 자식을 키우고 나날을 삭이면서 살았던 어머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애한다. 작품에서 작가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어머니를 추억하면서 그 그리움을 자신만의 아름다운 무늬로 구성한다. ②는 결혼 후 며느리로서 삶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가정의 엄격한 법도를 요구했던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늘 마음의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생활을 반추한다. 그의 수필에는 가족 중 시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것은 결혼 후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여성으로서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작가의 물음이다. 가족이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 여성의 삶이 지니는 보편적 의미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작가도 ③에 이르면 자식을 키우고 교육하는 어머니가  된다.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가 되면 그동안 살아온 삶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그 나름의 인생관을 확립한다. 자식 교육은 이러한 인생관을 피력하는 현장이다. 이런 행간과 문맥에서 작가의 개성과 사상적 깊이가 잘 드러난다. 

 

가족은 누구에게나 삶의 뿌리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은 내 삶의 운명적인 조건이면서 감정적이고 사회적인 무수한 의미와 가치를 생성시키는 터전이다. 자기 고백적인 수필이 가정과 가족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이 인간 삶의 보편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적인 이야기 수준에 끝난다면 그것은 곤란하다. 류창희의 수필에는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자전적인 이야기가 적지 않지만 그렇지 않다. 개인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인간 삶의 보편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창작방법의 일관성  


류창희 수필집 󰡔매실의 초례청󰡕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창작방법에 놀랄 것이다. 작가가 자신만의 뚜렷한 하나의 방법을 견지한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선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창작에 임하는 작가가 그리 흔치 않다. 방향성을 가졌다는 것은 자기만의 문학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문학 창작 과정에서 작가의 문학관과 세계관은 작품의 경향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작품은 작가 세계관의 발현이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한다고 했을 때에도, 그것은 문학이 객관적인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에 의해 의미화 되는 것이다. 문학관과 세계관 부재 상태에서 창작된 작품은 감동을 주기 어렵다. 세계에 대한 인식과 인간 삶에 대한 이해에 깊이가 없기 때문이다.

 

류창희의 수필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방법이고 통로다. 둘 사이의 알력이나 벌어진 틈보다는 긍정적인 화합에 무게를 둔다. “힘들었던 지난날을 아름다운 시절로 승화시켜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엄마를 닮은 글을 쓰자.”라고 다짐한다. 그는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삶을 꿈꾼다. 꽃처럼 아름다운 나날을 살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려면 세상을 아름답게 보아야 한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이 ‘유미주의’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인 세상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름답게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한 관점은 자연적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훈련과 노력에 의해 얻어진 하나의 능력이다. 자신을 달래고 가다듬어야 하며, 마음을 수양하고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그의 수필에는 절제와 규율, 수양과 겸손에서 오는 단아한 아취가 묻어난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작가가 유교 경전이나 동양 고전을 통해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류창희 수필의 일관된 방법은 문체 측면에서도 발견된다. 담긴 내용 못잖게 그릇도 단아하다. 우선 문장이 짧고 호흡도 적절하다. 수식을 피하고 최대한 압축미를 살린다.  대상의 섬세한 묘사보다는 설명적 진술이 두드러진다. 여성 수필가들의 서정적 필치를 선호하지 않는다.  


이 무슨 조화일까. 아직 비녀와 옷고름은 풀지도 못한 채 속곳부터 벗기려 했는가. 설탕이 몽땅 기진맥진하여 항아리 밑바닥에 굳어 있는 것이 아닌가. 밤마다 실랑이를 벌이다 날이 밝은 게 틀림없다./ 초례청에 들여만 놓으면, 저절로 거문고와 비파가 부부의 금실을 연주하는 줄 알았는데, 매실도 제 생긴 대로 제 사랑 방식대로 다루었으니, 공연히 고매한 매화 시를 쳐다보기 민망하다. (<매실의 초례청>에서) 

 


잡다한 수사적 기교를 최대한 배제하는 글쓰기다. 현란한 언어 축제를 수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미지 중심의 언어가 발산하는 막연한 서정의 조각들을 수필의 순수성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학의 진수는 절제된 언어에서 연유하는 풍부한 상상력과 깊은 사유다. 류창희 수필이 설명적 진술을 지향하면서도 서정적 묘사의 경우보다 풍부한 문학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언어의 절제와 생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의미를 함유한다는 문학 언어의 운용 원리를 제대로 실천했다고 하겠다. 가끔 등장하는 한자 성어도 언어의 압축이라는 점에서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압축과 절제를 지향하는 류창희의 창작방법은 주제 구현의 큰 틀로써 은유와 상징을 자주 채용하는데, 이것도 그의 일관성 있는 방법에서 파생된 것이다. 앞의 예문이 그 좋은 보기다. 매실과 설탕을 섞어 항아리에 담아놓고 숙성되기를 기다려 개봉할 때까지의 과정을 초례청에 든 신랑 신부의 관계에 비유한 작품이다. 두 개체나 두 인격이 만나 완전한 화합을 이루기가 쉽지 않음을 빗대어 말한다. 주제를 형상화하는 이러한 방법은 작품집 전편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려면 정신력 집중이 필요하다.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면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관된 흐름이 흐트러지면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형성하기가 어렵다. 류창희 수필을 읽어보면 작품 한 편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렸는지 알 수 있다. 일관성 있는 그의 창작방법도 이러한 진지한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 같은 태도가 류창희 수필이 앞으로 한층 더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 <<에세이문학>> 2009년 봄호에 실린 글


작가 류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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