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논어 에세이, 빈빈

한 삼태기의 흙

‘여자가 한 달을 자리보전하고 누워있으면, 남자는 이불째 둘둘 말아 내다버린다’고 하던가.

좀 나은가 싶으니 남편은 바람도 쏘일 겸 산책을 하자며 근처에 목욕탕이 딸린 헬스장 앞에 멈춰 섰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좀 나이질것 이라며 들어가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내 이름으로 한 달 분의 목욕탕 이용권을 끊는 것이 아닌가. 말릴 사이도 없었다. 

 

“여보! 내가 이러다 죄 받는 것은 아닌지…,” 

말을 하는데 주책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느닷없는 눈물에 당황한 남편이 오히려 눈길을 피했다. 그렇다. 병원비나 약값이라면 몰라도 사지가 멀쩡하면서 금방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돈을 내고 운동을 하다니. 팔자를 잘 타고 난 사람들의 일인 줄만 알았지, 어디 내가 누릴 호사라고 생각이나 하고 살았던가.

 

한학공부를 하면서 한자도 어렵고 고문의 내용은 아예 깜깜했었다. 이 말인가 하면 저 말이고 거의 가까운가 싶은데 천리나 멀리 있었다. 지식을 쌓는 공부라기보다는 날마다 자신을 닦는 수신이다. 마음을 잘 다스려야하는 사람공부다. 소양도 갖춰지지 않은 채 객기를 부리니, 종종걸음을 칠뿐 진전이 없었다. 가스 불 위에 이불호청을 올려놓고 삶기는커녕 다 타버려도 기미조차 몰랐다. 내려오는 속눈썹과 풀어지는 마음은 죽비를 걸어놓고 쳐다보며 다잡았다. 교자상을 벽면에 붙여놓고 그 사이에 끼여 앉아 스스로를 닦달하다가 마침내는 쓰러졌었다.

 

차라리 이참에 공부를 끊어버리자. 밥이 나오나 옷이 나오나. 넌더리가 났었다. 그동안의 시간을 묻어버리 듯 책을 덮어 버렸다. 그러나 안 본다고 편안하던가. 하던 짓이 그리워 다시 책을 폈을 때, 하필이면 위산일궤(爲山一簣)의 문장이 나왔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학문을 비유하자면 산을 쌓는 것과 같다. 마지막 한 삼태기를 붓지 않아 산을 이루지 못하고 중지하는 것도 내 자신이 중지하는 것이요. 비유하자면 땅을 고르는 것과 같다. 비록 한 삼태기를 부어서 나아감도 내 자신이 나아가는 것이다. (子曰譬如爲山에 未成一簣하여 止도 吾止也며 譬如平地에 雖覆一簣나 進도 吾往也니라. 子罕 제18장)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가족 중에 누가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살다가 손재수가 들어 집 한 채를 날린 것도 아니건만. 한 삼태기의 흙을 포기하려했던 자신의 몽매함이 설움처럼 토해져 목이 쉬도록 통곡을 했었다. 아마 그때 그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울 일이 없어 드디어는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마음은 나비처럼 훨훨 날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나마 어렵사리 고전을 지속해서 읽을 수 있는 청복(淸福)은 그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러닝머신 위에 섰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나만 보는 것 같다. 옆에서 뛰는 사람은 어디 갔든지, 바로 앞에 거울에게도 민망하여 힐끔거렸다. 마음이 작아져서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어제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20이라는 숫자에 맞춰놓고 조신하게 걸었다.

 

사람에게 다리가 있는 것은 나무처럼 가만히 서 있지 말고 걸으라는 뜻이 아닐까.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맑은 햇살로 샤워를 하고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늘 산과 들을 산책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는가. 사람이란 편하면 더 편하고 싶다.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있으면 눕고 싶고 누워있으면 잠자고 싶다. 그러나 영원히 잠들기에는 아직 읽어야 할 구절들이 많다.

 

 

힘차게 어깨를 좌우로 흔들면, 리듬에 탄력을 받아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이 된 듯 가슴이 쫙쫙 펴진다. 허리에 손을 얹으면 ‘나비야 청산가자~’를 하기위해 준비동작을 하는 여선생님처럼 아직 내 몸이 예쁘다. 두 팔을 번쩍 들어 엉덩이를 맘껏 ‘실룩샐룩’ 커피를 나르는 영화 속의 인물처럼 친절한 미소가 온몸으로 번진다.

 

다시 그날처럼 오늘 삼태기에 내 건강을 담는다. 내가 나를 만든다. 유리진열장에 든 명품이야 언감생심 큰 욕심 부리다가는 오히려 짝퉁만 낳는 수가 있다. 우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가판대 위에 뉘어진 이월상품은 면해보자.

 

 

 

 

<<논어 에세이 빈빈>>

<<매실의 초례청>>

류창희 

http://rchessay.com

'논어 에세이, 빈빈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족사진  (0) 2017.02.19
관솔  (0) 2017.02.19
숨죽이어, 숨 쉬지 않는 것처럼  (0) 2017.02.19
성인식 시연  (0) 2017.02.19
감추어 두시겠습니까?  (0) 2017.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