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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에세이, 빈빈

문상객

영검영척(寧儉寧戚)

 

 

나는 자칭 유학자(儒學者)였다. 여러 기관에서 개설한 인문학 <논어>라는 과목을 맡고 있다. 고서에 박제된 글자들을 끌어내어 현대와 접목하는 교량 역할이다. 얼마 전부터 장례문화(葬禮文化)를 설명할 때 나는 조심스럽다. 자신이 없다. 나의 존재, 나의 위상은 단 며칠 만에 곤두박질쳤다.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야기다. 유달리 돈독했던 고부의 정을 놓쳐버리고 망연자실했다. 어머님의 큰사랑을 자랑삼았기에 어머님의 안부를 묻는 이가 많았다. 그냥 어머님을 잘 보내드렸다고 답을 했다.

 

어머님은 살아생전 회갑잔치와 고희잔치를 마다하셨다. 대신 회갑 년에 곗돈을 모두 나눠 모임들을 정리하셨다. 그리고 마치 마지막 황천길을 닦듯, 먹을 갈아 반야심경과 금강경 병풍을 손수 쓰셨다. 나는 나이 서른에 벌써 어머님의 생활방식을 닮아갔다. 여느 주부들처럼 정기적으로 만나 식사하고 곗돈 내는 모임이 없다. 동창모임도 아이들로 말미암은 어머니들의 모임도 없다. 내가 만나는 이들은 한 개인 자연인으로 만나 현재 하는 일을 말하며 지낸다.

 

어머님이 떠나시던 날, 나는 누가 볼세라 몰래 밖으로 나가 겨우 친정엄마에게만 부음을 알렸다. 결혼식처럼 좋은 잔칫날이 아니다. 더구나 ‘초상’은 예정된 날짜가 아니니 초대는 있을 수도 없다. 고인의 친지들이나 직계 친인척들에게만 알리는 ‘가족사’라고 배웠고 그래야 하는 줄 알았었다.

 

어느 수필에서 시부모님의 장례를 치른 며느리에게 멍석말이를 시켜 문중의 대문문지방을 넘게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집안의 며느리가 시부모를 잘 모시지 못해서 돌아가셨기에 며느리에게 내리는 형벌이라 했다. 요즘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연로하시거나 병이 심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그러나 유교적 전통으로 보아 참 그럴듯했다.

 

문상객들이 왔다. 여름인지라 곱게 잠자리 날개 같은 세모시 옷매무새다. 나빌레라 우아한 자태로 여사(女史)님들이 기다린다. 아직 상주들이 성복(成服)을 갖추지도 않았다. 고인의 염(殮)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떻게 기다린 듯 저렇게 빨리 달려올 수가 있을까. 연일 그렇게 왔다. 그러나 나를 위로해줄 울타리는 없었다. 상중(喪中)에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부산서 산 세월이 얼마인데…,” 그러게 말이다. 입이 몇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나를 찾아온 문상객은 오로지 서울에서 오신 친정엄마 말고는 없었다.

 

그동안 내가 고인과 어떻게 살았으며, 그날 내가 어떻게 억장이 무너지는 줄은 아무도 모른다. 시댁에서 오로지 의지했던 내 편이 없어진 것이다. 그 슬픔을 문상객 숫자로 가늠한다. 상중에 눈총받고 나무람을 당할 만했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화장실에 가서 혼자 아픔을 삼켰다. 소리가 새나가지 못하게 가슴을 두 손으로 짓눌러가며 컥컥 울었다. 장례식장에 즐비한 조화들. 문상객들의 모습은 나를 찾는 손님이 숫자를 보태지 않아도 전혀 표도 나지 않았다.

 

내가 미안해하는 것은 나의 무능을 들켰기 때문이다. 고고한 척, 잘난 척하던 나의 인간성이 단박에 드러났다. 대소가 가족들 앞에서 참으로 부끄럽다. 내가 낳은 자식들한테도 민망하긴 마찬가지다. 나는 그동안 매정했다. 인정머리라곤 없었다.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친정아버지 부음도 친정동생의 부음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었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단지 어느 단체 명단에 이름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내게 청첩장을 우편으로 보내온다. 그의 자식은 어디 갔던지 그 장본인이 결혼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잠시 갸우뚱거리며 저울질을 해본다. 얼마나 보낼 곳이 없으면 나 같은 사람에게도 청첩장을 보냈을까. 이름 불러줄 때 꽃이 되자. 얼른 축하의 한 다발 꽃이 된다. 

 

우리나라 우스갯소리에 퇴직하면 경조사 문화 때문에 이민 간다는 말이 있다. 전에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이어령 선생이 고희가 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분은 문화창출의 일인자다. 어느 일간지에서 그분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살아오는 동안 후회되거나, 또는 앞으로의 포부 등을 물으니, “그동안 경조사를 챙기지 않고 살았던 것을 후회한다. 앞으로는 꼭 챙길 것이다.”라고 했다. 그 어른이 고희(古稀)가 넘어 깨달은 것을 나는 벌써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우니, 또한 다행한 일 아닌가.

 


공자, 가라사대. “예(禮)는 그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여야 하고, 상(喪)은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여야 한다.” 

(子曰 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 팔일편) 

 


임방이 공자에게 예의 근본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 시대에 진정한 선비정신은 무엇인가? 장례문화는 사회적인 치레인가, 부모님에 대한 도리인가. 내 아들, 며느리들이 나처럼 의문을 갖기 전 당부하리라.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여태까지 살면서 국가나 사회에 이바지한 것이 별로 없다. 내가 낳은 아이들 앞에서 곱게 떠나는 것도 나는 벅차다.

 

 



<<논어에세이, 빈빈>> 2015. 1.


류창희 

http:rchess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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