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정(鯉庭)
아기가 태어났어요.
예전에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아이들은 제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어요. 요즘은 아이를 맡아 키워줄 사람도 심지어 만들 시간조차 없다고 엄살입니다. 아이 하나에 경제적 부담이 너무 크다고 울상이죠. 어찌하겠어요? 이미 나온 아이를 다시 들어가라 할 수도 없고요. 무자식 상팔자 유자식 상팔자, 어느 것이 정답일까요. 자식을 교육하는 일은 지극한 고행일 것입니다.
까꿍(覺躬), 네 몸이 어디서 왔는지. 도리도리(道理道理), 머리를 써서 세상 도리를 깨달아라. 곤지곤지(困知困知), 곤궁해지면 지식을 얻어라. 잼잼(潛潛), 요동치지 말고 인내심을 가져라. 이비이비(理非理非), 만져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따로따로(他路他路),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너의 갈 길로 가라. 지지(知止), 그칠 때를 알아라. 유희 같은 손동작으로 예전에도 아기 때부터 교육했습니다.
《소학》에서 사람이 태어나 8세가 되면, 물뿌리고 쓰는 것부터(灑掃應對進退之節) 가르쳤다고 하면, “그럼, 소는 누가 키우노?” 항의 시위를 하겠죠. 지금은 학교에 갔다 와서 참고서인 전과 한 장 베껴 쓰면 숙제가 끝나는 세상이 아닙니다. 공부보다 사람이 되라고 하고 싶지만, ‘엄친아’ 아이들이 영어 유치원 다니고, 특목고 가고, S 대가고, 대기업에 취업하니 내 아이도 부지런히 따라갈 수밖에요. 부모가 조정하는 대로 잘 큰 아이가 왜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돌연 잠적해버리거나 우울증세에 시달릴까요. 그들의 행복은 누가 책임져 줄까요?
큰 나무 밑에 작은 나무가 자랄 수 없습니다. 그늘이 너무 커요. 어느 기업의 회장님처럼 야구방망이를 들고 옥상에 올라가 아들을 위하여 가해자를 때려줄 수는 없잖아요. 명예와 돈으로 해결할 힘이 있다면 끝까지 참견할만합니다.《고문진보》에 나오는 종수곽탁타(種樹郭橐鴕)는 곱사등이입니다. 그러나 나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키웁니다. 나무의 본성에 따라 해준 다음, 아주 내버린 것처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줄을 세워 심어놓고 학원과 과외방을 전전긍긍하며 새 흙으로 계속 바꿔줍니다. 나무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밤낮으로 어루만져 주며 게임을 하는지, 야동을 보는지? 부모의 눈이 CCTV처럼 작동합니다. 오죽하면 학교 교실에 ‘엄마가 보고 있다’는 급훈이 있을까요. 오로지 너만을 사랑한다며 나무껍질에 손톱자국을 내어 나무가 살았는가, 죽었는가, 자존심을 건드리고 흔들며 다 너를 위해서라고 하니,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맹자》에 알묘조장(揠苗助長)이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알면서 조장하는 거죠. 맹자 공손추 편에서 송나라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의 논에 벼가 빨리 자라지 아니하는 것을 민망히 여깁니다. 나락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죠. 매일 나가서 보면 내 논의 벼만 늦게 자라는 것 같습니다. 조급한 나머지 어느 날 아침, 일찍 논에 나가 온종일 아직 여물지 아니한 벼 이삭을 한 포기 한 포기 목을 길게 다 뽑아 줍니다. 집에 돌아온 아비는 처자식 앞에서 “나의 삶은 너무나 피곤하다”며 한탄을 합니다. 글쎄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요. 어디 그 옛날의 송나라 어리석은 사람만의 이야기일까요.
걱정도 팔자입니다.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고 《노자》는 절학무우(絶學無憂)라고 하네요. 인간들이 학문 따위에 힘쓰기 때문에 걱정이 많아진다는 거죠. 처음부터 공부를 안 하면 걱정 따위가 없다. “응” 하면 어떻고 “예” 하면 어떤가. 본질은 똑같다고 유학(儒學)의 예의범절 논리를 신랄하게 뒤엎습니다. 정말 ‘아는 것이 병’인 식자우환(識字憂患)입니다.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어둡고 어두운 밤중에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세상을 등지고 낚시나 하는 강태공조차도 배우라고 한 말씀 하십니다. 도대체 하라는 말인지, 하지 말라는 말인지. 천명(天命)을 아는 이후라면 몰라도 어찌 어린이나 청소년, 그리고 젊은이가 배우지 않고 살 수가 있을까요. 용기가 있으면 선택은 자유입니다.
조선 시대 책만 읽던 바보 이덕무는 자식의 불행을 세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 소년 등과. 둘째, 부모 덕에 취직하는 것. 셋째, 말을 잘하는데 글까지 잘 쓰는 것. 멋지죠? 요즘 엄마들이 바라는 현대인의 덕목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보화시대는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잘하면 신문에 나오고, 못하면 검찰청에서 오라하고, 돈 많이 벌면 세금고지서가 나오고, 골목골목 곳곳에서 시시각각 몰래카메라가 감시하는 우리나라입니다.
여태까지 동양고전으로 자녀 사랑을 살펴봤습니다. 그렇다면 명분을 앞세워 사람답게 사는 유학(儒學)의 시조이며 사립학교의 효시인 공자(孔子)는 어땠을까요. 제아무리 ‘눈높이 교육’의 대가인 공자라도 자기 자식을 가르치는 방법은 남다를 텐데…. 혹시, 고매한 척 가장하며 몰래 고액과외를 시키는 것은 아닐까. 아마 쥐도 새도 모르게 원정출산을 했거나 조기 유학을 보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방문을 잠가놓고 자식을 끼고 앉아 꿀밤을 쥐어박으며 아비가 손수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 그 당시도 궁금했을 것입니다.
진항이라는 사람이 공자 아들 리(鯉)에게 혹시 자네 아버님의 특이한 가르침이 있느냐고 묻었다. 공자 아들 리가 대답하기를 어느 날 빠른 걸음으로 뜰앞을 가로질러 빠져나가는데 공자가 홀로 뜰에 서서 공자, 가라사대. “시를 배웠느냐?”(인문학)“시(詩)를 배우지 아니하면 남과 더불어 말할 수 없다.” 또 다른 날 뜰앞을 가로질러 빠져져나가는데 뜰에 홀로 서서 “예(禮)를 배웠는가?”(실천)“예를 배우지 아니하면 세상에 나서서 행세할 수 없다.” 라고 하시기에 시를 배우고 예를 배웠다고 말한다. 진항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하나를 물었는데 시를 배우고 예를 배우고 군자가 아들을 멀리하는 것을 들었노라고 한다.
(陳亢 問於伯魚曰 子亦有異聞乎 對曰未也 嘗獨立 鯉趨而過庭 曰 學詩乎 對曰 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 他日 又獨立 鯉趨而過庭 曰 學禮乎 對曰 未也 不學禮 無以立 鯉退而學禮 聞斯二者 陳亢 退而喜曰 問一得 聞詩聞禮 又聞君子之遠其子也 - 계씨편)
공자의 자식교육은 가르침을 ‘뜰에서 가르친다.’하여 ‘이정(鯉庭)’이라고 합니다. 어디, 자식뿐 인가요. 가족도 친구도 지나치게 가까운 친압(親狎)은 금물입니다. 너무 가까우면 서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참견하고 찌르게 됩니다. 난로와 같고 고슴도치와 같이 서로 온기를 잃지 않을 정도의 객관적인 거리입니다. 지구와 달, 해와 달, 적당한 거리에서 끄는 힘, 미는 힘이 조화를 이룰 때, 한결같이 오래갈 수가 있습니다.
예전에 저희 엄마도 저에게 늘 말씀하셨죠. "나야 뭘 아느냐?, 네가 알아서 해라!" 요즘 어른들은 너무 똑똑해요. "니들이 뭘 알아?" 울타리 쳐진 뜰 안뿐만 아니라, 아이들 머릿속까지를 지배하려 듭니다.
<<논어에세이, 빈빈 >>
류창희
http://rchess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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