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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의 초례청

각시회

<각시회>라고 인쇄된 명단을 받았다. 갓 시집온 듯 다소곳한 아내를 인형처럼 바라보고 싶음인지 혹은 조신한 각시붓꽃을 연상했음인지 알 수가 없다. 자발적으로 모이는 부인들을 위해 남편 친구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그런데 뭔가 석연하지 않다. 홀로 서기에 당당한 이름이 아니다. 그들의 휘하에 두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아내들 이름 옆에 아이들 이름까지 적은걸 보면 한마디로 꼼짝 못하게 묶어놓겠다는 발상이다.

 

모임 이름이 놀림감이다. 가끔 아이들에게 당부하고 외출할 일이 있을 때 냉장고에 반찬과 국 데워먹고…, 듣는지 마는지 현관까지 쫓아 나와 다녀오시라는 인사 뒤에 후식처럼 한마디 더하는데, 그 표정과 목소리가 야릇하다. “흐흐흐 각시회 ~”

또 시작이다. 각시회는 무슨 각시회! 오늘은 엄마가 발표를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며 장황하게 설명을 한다. 뭔가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심어준다.

 

지난여름 변화를 시도했다. 생머리 단발에 무채색에 가까운 정장들이 밋밋해 이미지를 바꿔볼 요량으로 굽실굽실 층이지는 파마를 하고 나풀거리는 란제리패숀에 끈이 너덜거리는 샌들을 장만했다. 한 두어 번 거울 앞에서만 비춰 보다가 용기를 내어 편안한 자리에 곧잘 차려입고 나간다.

 

군에서 휴가 나온 아들 녀석이 허겁지겁 집으로 들어서다 말고 “엄마가 노는 아줌마예요?”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그 ‘노는’에 힘을 얻어 의기양양 성공한 표정으로 “그렇지? 엄마가 요즘 좀 놀거든” 이래서 사람은 변해야하는가 보다. 즉각 반응을 보인다.

 

작은 녀석은 늘 내 앞에서는 운전의 고수인척 한다. 난 가끔 지나가는 차안에 흰 레이스장갑과 검은 안경을 끼고 운전하는 여자를 보면 멋있어 보인다며 그런 장갑하나 갖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런 건 아줌마들이나 끼는 것이지”라며 발끈한다.

 

대소가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시동생이 코를 벌름거리며 다소 흥분된 억양으로 “아줌마, 아줌마 연변 갔다 왔어요?” 묻는다. “상해 갔었다니까요.” 맞받아치며 상해풍경을 설명하는데 “웬 머리는 끄실러가지고…” 파마한 것이 못마땅해 아예 형수님호칭을 빼고 구시렁거린다.

 

가족들이 정색하는 것으로 보아 난 엄마나 형수이긴 해도 아줌마는 아닌가 보다. 틀에 박힌 전형적인 아줌마 모습에서 벗어나 고유의 역할을 하라는 뜻일 텐데 그들의 참견이 칭찬인지 구속인지 속내를 모르겠다.

 

얼마 전 어느 문학 단체에서 ‘시인은 희망을, 여성은 생명을 노래하는 한마당’ 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나는 수필을 낭송하는 큰 역할을 맡았었다. 지하철역마다 붙은 포스터에서 제 어미 이름을 본 모양이다. 아들이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기기는커녕 쓴 소리를 한다. 아마 그 ‘여성’이라는 단어에서 심사가 뒤틀렸나보다. 

 

난 가끔 대범한척 말한다. 남과 북이 동서가 지구촌이 하나가 되어야한다며 무국경 무벽문화를 거창하게 말했었다. 그렇게 잘난척하는 엄마는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했을지도 모른다.

 

기회를 반으로 줄이는 자리에 참여하지 말라는 일침이다. 하다못해 ‘여류’자가 들어가는 우편물도 뭐라고 한다. 남자 여자 편 가르지 말고 자연인 유창희로 유창하게 살라는 요구다.

 

그렇다고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을 한 가지라도 맡아서 해준다면 그런 말들을 할 자격이 있다.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볼멘소리만 무성하다.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 시찰하듯 내 주위를 빙빙 돈다. 아는 채라도 할라치면 “앞치마 입고 글 쓰면 앞치마 글 나와요.” 순간 그들이 부추기는 바람결에 벌떡 일어난다.

 

나에 대한 응원가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단지 그들이 배가 고프다는 신호다. 난 그 순간 꼼짝없이 각시회 회원이 되고 만다.

 

 

 

<<매실의 초례청>>2008

류창희 

http://rchess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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