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타, 메타
꿈이 무엇이었을까. 처음에는 내가 입고 싶은 옷을 그렸다. 나중에는 친구들이 원하는 스타일로 맞췄다. 중학교 시절, 내가 하던 짓이 디자이너였다. 로망roman이 내게로 온 것일까.
원고청탁에 맞춰, 테마수필 아포리즘수필 여행수필 독서수필 실험수필 퓨전수필 수화수필 논어수필 유학수필…, 이번에는 수필을 수필로 기술하거나 분석하는 메타수필을 쓰란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수필의 부표가 없다. 줏대 없이 표류 중이다.
수필을 액션action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변고가 닥칠 때마다 “오우~, 글감!” 종군작가가 된다. 어려움이 오히려 발전하는 기회다. 긍정마인드로 전환하면 견뎌낼 힘이 생긴다. 쉼 없이 몇 두레박씩 퍼 올리니 흙탕물이 나오고 바닥이 드러났다. 내 행위에 정신이 팔려서 내 순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보물찾기 놀이처럼 남보다 먼저 ‘유레카!’ 발표하는 것을 잘하는 짓인 줄 알았다.
여기저기서 이름을 불러주니 폼나게 잘 쓰고 싶었다. 디자인과 색상에 멋을 내고 주머니와 단추 리본과 코사지도 붙였으니, 크리스마스트리와 다를 바가 없다.
재미니즘에 노닐었다. 나에게 수필은 즐김이다. 책 한 권을 쓰는 동안, 눈치 없이 겁 없이 썼으니 얼마나 기고만장했었겠는가. 허물을 알면서도 글을 놓지 못함은 원고청탁이다. 청탁서는 세금고지서처럼 살아있음의 실존이다. 즐거움〔樂〕은 근심하는 데서 생겨야 싫증이 없나니, 즐기는 자의 고뇌와 수고로움을 내 어찌 잊겠는가.
어느 분이 내 글에 혀 짧은 비평으로 평론집을 냈다. 그 당시 나의 자존감이라고 여기던 글이 홀라당 벗겨졌다. 감히 평론가의 말씀인데, 수긍하고 존중하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작고 문인이었으면 좀 좋았을까. 살아있어 괜한 불평이다. 나는 누구에게 ‘방인*’ 노릇은 못한다. 아니 방향키 불량으로 자격이 없다. 못났다. 언제쯤 구겨진 소갈딱지를 바로 펼 수 있을까.
어느 날, K팝 스타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봤다. 뮤지션 JYP는 음정 박자 기교가 좋은 사람을 오디션에서 탈락시킨다. “너 지금, 노래 잘 하는 것 자랑하러 나왔냐?” 관중이 공감해야지, 객석에 구경꾼만 많으면 ‘광대’라는 지적이다. 쌍벽을 이루던 YG는 그날, 뭐라 했을까. “뻔-한 것을 뻔-하지 않게, 유치한 것을 유치하지 않게”하란다.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일상이 되고 예술이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낯설기가 예술이라는데, 결국 죽도 밥도 아닌 글을 쓰며 두렵다.
나만의 브랜드를 갖자! 기성복이 아닌 근사하게 아방가르드 스타일로 입자. 슬로건은 그럴듯해도 저 살던 대로 산다. 반가의 집성촌에서 태어나 유학의 정서로 자랐다. 내게 논어는 기본배경이요, 공자님의 말씀은 패턴이다. 살아있는 동안 나는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예의와 염치의 옷깃을 여밀 것이다. 내 생각의 잣대로 재단하고 가위질하고 꿰맸다. 두들겨 맞을 용기를 가지고 독자들에게 다가갔다. 과분한 리뷰로 또 우쭐했다. 지병持病이다. 이럴 때는 장르를 환기해야 한다.
환기창을 어떻게 열까. 읽기다. 글쓰기가 어려울 때 방편이다. 어느 분은 책 한 권을, 혹은 글 한 편을 몽땅 필사도 한다는데, 나는 밑줄 그은 부분을 타이프로 친다. 한 권의 책에서 단어 하나만 건져도 횡재라는데 매번 소책자 한 권 분량이다. 점점 내 입과 귀만 ‘안다이박사’ 박물군자가 된다. 남의 글은 훌륭한데 내 글만 춥다. 다시 껴입는다. 그렇다. ‘티끌모아 글’이라는 말이 맞다. 글을 많이 써 놓으면, 남의 글을 읽다가 비로소 내 글이 보인다. 나에게 읽기는 퇴고다.
수필이 리액션reaction임을 감지한다. 글쓰기는 독자와의 대화이다. 글을 썼다고 끝난 게 아니라 독자의 반응까지가 글의 완성이다. 다식판이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틀에 새겨진 문양이다. 수필은 내면을 정화하는 도구다. 나의 꿈은 디자이너다. 기양技癢 증세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오기의 깃발을 세운다. ‘틀을 깨면 잰틀’하다.
한 장의 천으로 단순하고 가볍게 하기다. 체형에 상관없이 옷감과 신체 사이 공간이 자유로워야 한다. 무엇보다 옷은 편안해야 한다. 그러나 편안함만 느끼고는 안 된다. 더 편안해야 한다. 아름다움까지 더하면 옷은 잘 팔리겠지만, 디자이너는 팔리는 것을 목표로 하면 안 된다. ‘저렇게도 할 수 있네.’ 평범함이 없어야 한다. 심심하면 재미없다.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춤사위를 보일 수 있는 활동성은 있되, 천을 아낀 느낌이 없어야 한다. 바람을 가르는 요트yacht의 세일sail처럼 날렵하게 펴서 올렸다가 접어 내린다.
그래, 나는 글 쓰는 사람이다. 글은 옷이다. 지성과 감성으로 치장해도 가장 명품은 자신감을 입는 것이다. 그러나 옷은 옷, 글은 글일 뿐! 결코, 내 삶의 됨됨이를 뛰어넘지는 못할 것이다.
수필, 부질없다.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다. 그런데 그 쓸데없음이 나를 지탱하는 정체성이다. “알몸으로 태어나 옷 한 벌은 건졌”다는 타타타तथाता*다. 배냇저고리를 입은 날부터 벌거벗은 적이 없다. 글은 나를 감싸주고 품과 격을 입혀주는 혼魂이다. 수필을 벗 삼고, 수필을 스승 삼는다.
글의 스타일도 빼어나게 잘 쓰기보다 진여眞如한 것,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한 편의 수필답게 잘살기를 꿈꾼다. 수필의 돛을 세운 항해에서 나만의 패턴을 담은 수의壽衣 한 벌 마련하고, ‘쓰다 가다〔魄〕’ 그거면 됐다.
혼백의 닻을 내리는 그날까지, 타타타~ 메타!
* 方人 : 인물을 비교 • 논평함. 일설에는 남의 허물을 비난함. - 漢韓大字典
* 타타타 : 진여(眞如)는 "있는 그대로의 것" · "꼭 그러한 것"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타타타(तथाता, tathātā)의 번역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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