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캄
“아, 일 안 하고 싶다.”
원고료로 먹고사는 사노요코의 말이다.
가방 안에 속옷과 책 한 권뿐이다. 그곳이 어디라도 괜찮다. 다만, 당당하게 출가하고 싶다. 초록은 동색이라는데 나는 무색이다. 한 분은 명랑과다이고 못난이는 우울 진창이다.
다음날 튕기듯 나왔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자. 본부는 합정역 3번 출구, 행동개시는 시청역부터다.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을 따라 궁 안에서 휴식하고 돌담길을 걸어 덕수초등학교에 들어가 천문대를 본다. 관리인이 나와 묻는다. “법조계에 계세요?” 검은 투피스에 흰 블라우스, 아니면 낮은 구두에 민낯 때문일까. 덕수초등 출신이 법조계에 많아서 졸업생인 줄 알았단다. 궁 근처에 민가가 없어도 수영장 체육관 정책으로 인기가 있는 학교라고 한다.
초등학교 바로 앞에 경기여고 자리가 있다. 학교는 강남으로 이사 가고, 담벼락에 담쟁이덩굴만 무성하다. 나는 글을 쓰기 전에는 몰랐다. 경기여고 나온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분들의 삶과 생각을 새삼 배우는 중이다. 녹슬고 부서진 철문으로 마음 놓고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나의 태도가 얼마나 진지하였던지, 지나가던 외국 청년도 내 옆에서 코를 들이박고 들여다본다. 빈터다. 그는 내게 뭘 보느냐고 묻는다. 이곳은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 여자 하이스쿨이었던 자리라고. 주제넘은 사설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에 외국인을 포함한 몇몇이 둘러서 있다. 나는 어설펐던 콩글리시konglish가 부끄러워 서둘러 골목에서 빠져나오며 “어디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왔다고 한다. “바이, 바이~ 해브어 굿 타임” 헤어져 신문사 골목 칼국수 집으로 가다가 “아차차!” 같이 식사하자고 했으면 좀 좋았을까. 젓가락 사용법과 매운 김치의 맛도 보여줄걸. 대책 없이 집 나온 나의 한계, 내 그릇이 딱 고만하다.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성공회 뜰에서 꼬박꼬박 졸며 해바라기 한다. 자주 수녀원 앞뜰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리던 곳이다. 서늘한 교당에 들어가 장엄한 파이프오르간을 올려다보다 막 지하 묘에 들어가려는데, 어느 그룹 회장 선친 묘도 있다는 말에 덴 듯 총총걸음으로 나왔다. 바보, 심보가 옹졸하다. 오래전, 알리앙스 프로세즈와 세실극장도 그대로 그 자리다. 소공동 지하상가에서 곧잘 청춘의 길을 잃던 시절이 숨바꼭질하듯 되살아난다.
시청 앞 광장, 광화문 우체국, 동아 조선 서울 신문사들도 건재하다. 무교동에서 가장 높았던 20층 빌딩에 ‘남강타워’라는 로고가 없었다면 온통 유리 벽으로 고친 건물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결혼 전, 7년 동안이나 매일 출퇴근하던 건물이다. 건물 뒷골목에 자주 가던 ‘아가페 다방’은 흔적도 없다. 나는 아가페 마담의 꼬아 올린 한복 자태에 매료되어 모닝커피를 시켰었다. 그 시절의 마담보다 지금 내 나이가 훨씬 지긋하다. 속절없는 뒤안길이다.
서울은 현재 축제 중. 탑골공원, 낙원상가. 인사동의 공방 ‘마비에’서 들어가 간이 의자에 앉으니, 친구가 보이차를 연방 우려 준다. 어스름 저녁이다. 목젖이 따뜻해지니 뭉쳤던 다리가 풀린다. “얘, 친구들 연락할까?” “아니, 혼자 걷고 싶어. 나 집 나왔어” “야, 너 멋지게 산다.” 멋, 그렇다. 몸은 천근만근 너덜너덜해도 마음은 충만하다.
셋째 날, 종각과 종로통 청계변이 야단법석이다. 메가폰 마이크 머리띠 현수막이 빨강 파랑 노랑 초록…, 태극기와 성조기를 비롯해 각양각색이다. 어느 날 대형마트 앞을 지나가는 깃발을 보며, 세 살배기 손자가 “뭐 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물었다. “뭘까?” “뽀르르 비타민 달라고 하는 거예요.” 으스대며 알려준다. 아기에게도 뽀통령이 있듯,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며 애환동물을 훈육하는 개통령도 TV에서 바쁘다. 모두 누군가에게 그 무엇을 달라고 시위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필요한 게 없다.
내가 머무는 방에는 TV도 시계도 없다. 머리빗이 없어 며칠째 손가락으로 얼기설기 쓸어내리며 머리카락을 말린다. 슬프다고 생각했던 높은 천장도 아늑하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햇살이 비치니 한 줄기 바람도 살랑인다. 책 읽기 좋은 방이다.
《사는 게 뭐라고》 책을 펼쳤다. ‘일본인의 노후를 읽었다. 어느 쪽을 펼쳐도 훌륭한 사람들뿐이다. 모든 사람이 긍정적인 데다가 앓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이 책을 보니 자식들에게 구박받고 푸념을 늘어놓는 할머니도, 교양 없는 할아버지도 없다. 정말로 다들 훌륭하다. 화창한 날씨에 읽고 있자니 더 우울해졌다.’ 그렇다. 책을 쓰는 사람들은 어쩜 그리도 인성이 다 훌륭할까.
넷째 날,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앞 현대미술관 뒤뜰에 앉았다. 햇살도 나른하게 한갓지다. 내가 자라던 서울, 궁핍했던 서울이 이토록 고요하고 너그러웠던가. 스무 살 무렵, 나는 서울만 벗어나면 살 것 같았었는데, 돌고 돌아 화갑華甲이 지난 요즘은 돌아만 가면 살 것 같다. 관계에서 고립되고 싶다. 곳곳을 배회해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으니 세상이 마냥 화사하다.
출가 나흘 만에 돌아왔다. 발칵 뒤집힐 줄 알았다. 아무도 그 무엇도 묻지 않는다. 그대로 일상이다. 억울하다. 무정하다. 그런데 외려 마음이 잔잔하다. 여태까지 혼자 펜스 룰을 치고 애면글면했다. 이 낯선 느낌? “오우~ 그래, OKLM!” 드디어 내가 나를 찾은 것이다.
나의 오캄을 위하여! “아, 일하고 싶다.”
* 오캄 : 프랑스어로 ‘고요한’, ‘한적한’을 뜻하는 말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심신이 편안한 상태. 또는 그러한 삶을 추구하는 경향. ‘OKLM’으로 표기되기도 하며, 연관 있는 단어로는 스웨덴의 ‘라곰(lagom)’, 덴마크의 ‘휘게(hygge)’ 일본의 ‘소확행(小確幸)’이 있음. - 시사상식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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