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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련 瑚璉 <구름카페 문학상 수상>

고흐의 환생

고흐의 환생

 

  비가 내린다. 캠핑장으로 돌아와 밥을 하는데 점점 주룩주룩 내린다.

 

  오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배경지를 시작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해바라기’ ‘노란 집’ ‘정신병원’ ‘여름정원’ ‘도개교까지 고흐의 발자취를 쫓아다녔다. 발목이 부러질 것 같다. 이런 날은 설익은 밥을 먹어도, 인스턴트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어도, 떡에 꿀을 바르지 않아도 꿀떡꿀떡 잘 넘어갈 것 같았다. 금방 뜸들이 마친 밥, 스테이크 한 조각 굽고 양상추와 오이를 썰어 쌈장을 얹어 목젖이 다 보이도록 폭풍흡입 하는 중이다. 종일 비를 맞고 다닌 꽃송이 원피스의 낭만과 벗어 놓은 고무줄 낡은 속옷이 나른하게 널브러져 있다.

 

  빗줄기가 거세지는가 싶더니, 천둥 번개까지 요란하다. 설거지통 버너 밥솥 물통, 대충 끌어다 텐트 안에 들여놓고, 가부좌 틀고 앉아 밥을 먹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텐트 바닥이 올록볼록 두더지 머리처럼 살아 움직인다. 텐트 자체가 공중부양하려는지 둥둥 뜬다. 하필이면 우리가 친 텐트 밑이 바로 물꼬다. 한쪽으로 짐들을 밀어붙이니 다른 한쪽이 불룩하게 솟는다. 나는 물풍선이 재미있어 어머머!”라며 손뼉 쳤다.

 

  남편이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나간다. 잠시 후, 야영장을 관리하는 장정 서너 명이 들이닥쳤다. 그중 매니저인 듯 보이는 남자가 한 손은 반바지 주머니에 다른 한 손은 담배를 꼬나물고 노프라범!” 턱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남편은 그의 거만한 태도에 화가 났다. 장소를 바꿔 달라. 너희가 유색有色인이라고 일부러 조건이 안 좋은 곳을 빌려주는 바람에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사실 유럽 곳곳에서 아닌 척, 은근히 인종차별을 받는다.) 프랑스 남자는 노프라범!” 자기네 잘못이 아니라는 몸짓으로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하며 또 하늘을 쳐다본다.

 

  야영장의 물이 온통 우리 쪽으로 흐른다. 삽시간에 도랑이다. 물의 본성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아직 떠내려간 것도 텐트 안이 젖은 것도 아니니 기다리면 그칠 것이라는 말이다. 유럽인, 그들은 뼈대가 말처럼 뻣뻣하다. 우리처럼 쓸개와 창자를 빼놓고 고개와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손님 비위를 맞추지 않는다. 남편은 야영장 잔디 바닥을 맨발로 뛰어다니며, 지금 우리 텐트 안은 스위밍풀!”이라고 소리쳤다. 때마침, ‘번쩍, 우르르 쾅쾅!’ 천둥과 번개가 조명까지 비춰준다. 나는 입안에 미처 넘기지 못한 밥을 우물거리며 여보, 아직 수영장 정도는 아녜요.” 남편은 어쩜 나 때문에 더 화가 났을 것이다.

 

  이곳은 남프랑스, 아를이다. 아를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미친 듯이 광기를 휘두르며 살다 간, 화가 에스파스 반 고흐뿐이다. 나는 금방이라도 귀를 자를 것처럼 펄펄 뛰는 남편의 편을 들었어야 했다.

 

  유럽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목소리 높이며 화내지 않는다. 그들은 부당하면 우리처럼 큰소리로 따지거나 멱살 잡지 않고, 조용히 경찰을 부른다. 우리 집 남정네만 막무가내로 ! 이놈아, 우리는 손님이야.”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나운지 장대같이 퍼붓던 빗줄기마저 슬그머니 가늘어졌다.

 

  “! 이놈들아, 손님이 왕인 것 몰라?” 그러나 어쩌랴? 그들은 모른다. 그들이 오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잠잘 곳이 필요해서 찾은 곳이다. 수요와 공급만 있을 뿐이다. 나는 남편 손에 든 젓가락부터 빼앗았다. “저 사람들은 우리나라 젓가락을 무기로 봐요.” 남편의 물에 젖은 샌들을 발 앞에 놓으며 여보, 품위를 지키세요.”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신고할까 봐 겁이 났다. “여보, 김치 먹은 놈이, 고기 먹은 놈 절대 못 당해요.” 그들이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나는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남편 옆에서 속삭였다.

 

  한번 터진 봇물은 막지 못한다. 아주 익숙한 광경이다. 이곳은 지금,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나이가 벼슬인 나라 한국이다. 텐트 안이 순식간에 독방이다. 우리는 싸움구경이 으뜸인데, 이들은 남의 일에 참견은 금물이다. 앞 동 텐트 차일 앞 식탁에서 밥을 먹던 프랑스 가족은 얼른 일어나 들어간다.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빼꼼 내다보니, 어미가 아이들 눈을 가리며 텐트 지퍼를 올린다. 너른 야영장 안에 우리 부부만 따돌림당했다.

 

  아~, 섬이다. ‘꼼작 마라.’ 대적하는 중인데, 이럴 때 이곳 야영장에서 우리 텐트 평수가 가장 넓다. 유럽에서는 큰 것이 먹어준다며 남편은 원터치 작은 것을 마다하고 한국에서 큰 사이즈를 사왔다. 프랑스 남자가 어디다 급히 전화하니, 교회의 부흥회도 아닌데 할머니와 며느리 그 집 어린 아들까지 총동원했다. 타고 온 차에 텐트도 실려 있고, 매트리스도 실려 있고, 또 다른 장정도 서넛 더 왔다. 자기들의 텐트를 쳐서 우선 대피해 있으라 하고, 남편은 너희 것은 더러워서 안 쓴다고 맞섰다. 여인들은 나에게 호텔비를 줄 테니 철수하라고 한다. 그러나 나의 남편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꼭 평평한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버티고 서있다.

 

  사실 어디가 어디인 줄 알고, 처음 온 나라에서 빗속에 숙소를 옮기겠는가. 한참 후, 프랑스 남자가 남편을 보고 따라오라 한다. 새 터를 보여주고 'OK' 한 모양이다. 언제 왔었느냐는 듯 그새 비는 그치고, 저녁 햇살까지 선명하다. 그래도 한국 사람에게는 오기라는 것이 있다. 본때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나는 민망하여 커다란 이민 가방 안에 주섬주섬 이삿짐을 넣으려는데, 남편이 냅다 소리 지른다. “놔둬!” 쟤네 잘못이니 쟤들이 싸도록 놔두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김칫국물 묻은 밥공기, 숟가락 젓가락, 쌈장, 고추장, 마늘장아찌, 전기장판, 베개, 프라이팬, ‘쿠쿠소리 나는 압력밥솥, 통 넓은 속 고쟁이.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한국의 의식주衣食住 잡동사니를 그들에게 맡겼다.

 

  울지도 웃지도 소곤대지도 소리치지도 못한 체, ‘- -’ 소나기다. 한순간에 닫아버린 지성, 감성, 이성, 그것들은 잠시 휴식할 차례다. 나는 그동안 갈고 닦은 나만의 자존심, 누가 볼세라 교양을 잽싸게 챙겼다. 집 나가 화냥질하던 여편네가 남편에게 붙잡혀 들어가듯, 교양 보따리 하나 끌어안고 그들을 향해 메르시mεrsi미소 지으며, 프랑스 장정들이 새로 친 아를의 텐트 안으로 들어섰다.

압생트absinthe술 향에 취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이내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다. 아를은 역시 아름답다. 총총 별이 빛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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