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벙첨벙
우산을 써도 시원치 않은데, 지나가는 차도 물벼락을 끼얹는다. 구두 속에 물이 차더니 순식간에 벗겨진다. 순간, 삽화 한 장이 떠오른다.
스무 살 무렵, 명동 케리부룩에서 빨강색 단화 한 켤레를 샀다. 월급에 비해 거금이다. 토요일 오후, 퇴계로 2가 육교를 건너 친구와 남산 길을 오르고 있었다.
남산골 중턱 한옥마을을 지나가는데,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쏟아졌다. 골목길이 금세 봇물이다. 종이쇼핑백이 찢어지면서 구두 한 짝이 떠내려간다. 빨리 쫓아가 붙잡아야 하는데 처음에는 허둥대다 ‘둥둥♬’ 떠내려가는 구두모양이 장난꾸러기 소녀다. 번쩍, 번개불꽃에 웃음보가 터졌다. 구불구불 휘말리다 이곳저곳 곤두박질 부딪힌다. 빨강구두 춤사위가 경쾌하다. 빗소리에 파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다. 하늘도 땅도. 혹시, 남산골샌님들의 혼령은 들었을까. 청렴과 결백을 삶의 목표로 경서經書를 읽다가 몰래 창호지 구멍으로 내다봤을지도 모른다.
여윈 뺨, 코와 입은 비록 쪼그라졌으나 굳게 다문 입술과 수염, 눈매는 결기에 차있다. 남루한 의복과 매무새는 우스꽝스럽지만, 앙큼한 자존심과 꼬장꼬장한 '딸깍발이'라는 선비정신이다. 흐르고 흘러 부산까지 떠 내려왔다. 제도권의 순탄한 행보였을까? 그 길은 하늘 길도 기찻길도 고속도로도 아니었다. 40여 년 전의 남산골 빗소리가 문득, 오늘 내 발속에서 들린다.
맨발로 강의실에 들어서니, 까르르 깔깔 해양 도시답게 웃음바다다. 짚신 삼을 여유도 없이, 사철 철없이 딸깍거리는 나막신 한 짝을 손에 들고, 물에 빠진 생쥐의 꼬락서니라니. ‘논어에세이’ 수업시간, 해운대도서관 생원님들이 “신신여야 요요여야 申申如也 夭夭如也*” 빗소리 아랑곳 하지 않고, “몸을 활짝 펴고 마음은 온화”하게 논어문구 사이에서 첨벙첨벙 왈츠 스텝이다.
* 子之燕居 申申如也 夭夭如也 論語 述而篇
류창희 : 《푸른솔문학》 2020-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