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전쟁이 나면, 총 맞아 죽기 감기 걸려 죽지 않는다.
나와 엄마는 격리되었다. 온 국민이 온 세계가 ‘코로나 19’ 확산으로 전시상황이다. 병구완생활에 지친 나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친정엄마는 고관절 골절로 두 달 동안 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 팔순 노파가 고통과 극도의 불안함으로 고래고래 소리 질러 딸을 찾는다. 병실마다 쫓겨 맨 끝방 1인실로 옮겼다. 밤에도 몇 번씩 응급실로 가야 하니, 나는 자궁 안의 태아 자세로 버텼다.
모녀는 마스크를 꼈다. 둘만 꼈는가. 병원 안의 모든 사람도 거리의 사람도 티브이 안의 국민도 다 꼈다. 나는 바이러스를 차단하기 위한 마스크고, 엄마는 산소마스크다. 이제 엄마는 배변인지가 어렵다. 피 주사, 무통, 항생제, 포도당, 알부민 등등, 링거 줄이 주렁주렁하다. 소변 줄을 끼고, 기저귀를 찼다. 노상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는 오히려 보송보송한데, 내 꼬리뼈 부분이 짓물렀다.
치료하러 길 건너 병원에 갔다. 검은 바지 검은 점퍼 검은 안경 검은 마스크로 전투복 차림이다. 피부과에 들어서니 간호사들이 뜨악하게 바라본다. 병원 안이 영화에 나오는 살롱 배경처럼 고급스럽다. 하기야 80층 최첨단아파트 상가다. 너른 공간 안에 환자는 나 혼자다.
병간호하다가 욕창이 생겼다고 하면, 특정 지역 특정교회에서 온 의심을 받을 것 같다. 마침 종아리에 손톱만 한 붉은 반점이 나타나 있었다. 나는 도장 부스럼이 난 것 같다며 어쩌고저쩌고 ‘저구지교’ 행세를 했다.
젊은 남성 의사도 마스크를 꼈다. 요즘은 서로 눈길을 피하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다. 미안해하며 작은 상처를 보여줬더니 ‘건조증’이라며 컴퓨터만 들여다본다. ‘넌, 이 시기에 왜 왔니?’ 대한민국 국민 맞느냐는 남파간첩 취급이다. 의사의 적대감을 무시하고 “그런데요~” 머뭇머뭇 “제가 보이지 않는 곳에…….” 그제야 보여 달란다. “여기서요?” “예!” 순간, 나는 선체로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까내렸다. 그는 아마 내 환부를 봤을 것이다.
어색한 순간이다. 약은 우선 일주일 치 처방을 했다며 어서 나가라는 눈치다. “질문이 있는데요.” 대꾸도 안 한다. 나는 얼른 마스크를 벗으며 “제가 평생 화장도 안 하고 막살았더니, 얼굴이 이렇게 되었어요.” 의사는 내 엉덩이 부근의 욕창 따위는 벌써 잊은 듯하다.
“이런 저승꽃이나 점도 뺄 수 있나요?” 나는 호기심으로 물었는데, 의사도 잽싸게 마스크를 벗는다. 개념 없는 아줌마를 한순간에 스캔한다. 나의 나긋나긋한 말씨에 순간 매료된듯하다. 첨단 확대경(피부과용 우드램프 피부 확대경 자외선 확대경)을 들이대면서 정겨운 미소까지 보인다. “지금, 시술하시죠.” “지금요?” 벌써 초크를 들고 내 얼굴에 황칠 하더니, ‘점 빼기 좋은 계절’이라며 친절하게 설명까지 한다. 그렇다. 전 세계 전 국민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가족 말고는 사적인 교류도 없다. 시술하기에 딱 좋은 시기가 맞다.
간호사가 쏜살같이 들어오더니, 여러 개의 방중, 가장 햇살 가득한 방으로 안내한다. 그곳에서 나는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듬뿍 바른 마취제가 스며들기를 기다린다. 활기찬 목소리의 의사 선생님이 “사모님, 사모님!”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 묻는다.
그런데 그는 알까. 내가 가장 싫어하는 호칭이 ‘사모님’이라는 것을. 사모님은 잘나가는 남편이 제공해준 신용카드로 성형외과 서핑을 하는 마담 느낌이다. 마취제만 처바르지 않았다면 벌떡 일어나고 싶다. 졸지에 나는 사모님으로 격상되었으니 어쩌랴. 꼼짝없이 누워 고기 굽는 냄새를 맡아야만 했다. 우아한 화형火刑이다.
나는 호구虎口가 되었다. 어찌 아느냐고? 백화점 명품 코너에 어정거리면 밀어내지만, 그런대로 참한 매장에서는 “사모님, 뭐 찾으시는 것 있으세요?”라며 안쪽으로 안내한다. 은행에서 1천만 원 이상 정기예금을 넣으면 “사모님, 기한은?” 우수고객이다. 마트에서는 고객님, 전통시장에서는 아줌마 또는 새댁(?)이다. 그러나 생명과 질병을 지켜주는 병원에서는 고유명사로 이름을 부른다. 역시, 죽고 사는 건 개인적인 일이다.
시술 후, 한동안 햇볕을 피하란다. 그동안 친정엄마는 쪼그리고 앉아 밤새는 딸 없이도 요양병원 집중병동에서 재활치료를 잘 받고 계시다. 그날, 오가는 발길 뚝 끊긴 피부과 의사 선생도 간호사 선생들도 나에게서 생존의 비용을 벌었다. 핑곗김에 박쥐처럼 밤에만 나다녔더니, 나의 욕창도 슬그머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내 얼굴의 피부도 창상 피복재 테이프 안에서 잘 살아나고 있다.
그럭저럭 입춘을 맞이하고, 동백섬에 동백꽃 붉더니, 매화 지고, 목련 지고 우수와 춘분이 지나갔다. 사람들은 TV로 세상을 본다. 총칼보다 무서운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다. 이 나라 저 나라 동서양 할 것 없이 국경을 봉쇄하고, 학교는 휴교하고, 행정명령으로 단체행사 금지, 사회적 거리 두기로 정치 경제 사회가 ‘일단 멈춤’이다. 천륜과의 관계마저 차단당하고 있다.
‘사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낸다*’ 곳곳에서 생명이 움튼다. 먼 산의 진달래는 피고 졌는지, 냉이 꽃 제비꽃 양지꽃 지고 피고, 피고 지고, 또 핀다. 봄이 코로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외출을 자제하는 동안 살충소독보다 진한 수수꽃다리 향이 골목마다 “丁香丁香♬dingxiangdingxiang♬” ‘나 일어났다’고 희망을 노래한다.
* T.S 엘리엇의 <황무지荒蕪地> : 영국의 시인 엘리엇이 지은 장시(長詩).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황폐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전후의 상황을 혼란ㆍ환멸ㆍ절망 따위의 주제로 노래하고 있으며,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다.
* 류창희
《좋은수필》 2020-06 . 《에세이부산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