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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논어> 타타타, 메타

답다

답다

- 군군신신君君臣臣

 

 

 

나라는 나라답고, 국민은 국민답고, 편 가르기 하자는 것인가.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이에 경공이 “좋은 말이로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창고에 가득한들 내 어찌 그것을 먹을 수가 있겠오.

齊景公이 問政於孔子ᄒᆞᆫ대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니이다. 公曰 善哉라 信如君不君ᄒᆞ며 臣不臣ᄒᆞ며 父不父ᄒᆞ며 子不子면 雖有粟이나 吾得而食諸아 - 顔淵

 

국가나 가정은 공동체다.

경공은 공자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했다. 공동체가 잘 유지되고 더욱 발전하려면, 구성원들이 자기의 위치와 본분을 잘 지켜야 한다. 예전의 군신은 지금의 나라와 국민이다. 각자가 주체가 되어 나라의 일을 하는 자, 세금을 내는 국민, 부모와 자식이 된 자는 이름에 맞는 소임이 있다. 역할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바르지 못하면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명분이 바로서야 한다.

 

경공은 영공靈公의 아들로 대부 최자가 자기 처와 밀통한 장공莊公을 죽이고, 대신 내세운 임금이다.

장시간 보위를 지켰으나, 총애하는 여자가 많아 그녀들의 눈치를 보느라 태자를 세우지 못했다. 그로인해 군주를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하는 화근이 된다. 경공의 이름은 저구杵臼. 저구를 빗대어 절구와 절굿공이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마구 사귀는 것을 저구지교라고 한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익자삼우益者三友를 권한다. 정직하고 진실하고 견문이 넓은 친구의 사귐이다. 요즘 부모들도 자식의 교우를 도우려고 위장전입으로 학군과 유치원 조리원동기까지 만들어 주는 세상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군자답다, 선비답다, ‘답다라는 이름값 때문에 옴짝달싹 못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했던가. 그 책임이 버거워 일도 결혼도 자녀출산도 마다하는 추세다.

 

청년시절, 열정적인 연애를 하다가 부모님께 소개하던 날을 기억할 것이다.

걔는” “엄마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어쩌구, 저쩌구, ‘저구, 저구. 부모는 안 보고 살 수 있어도 그 아이 없이는 못살 것 같았다. 부모님의 말씀이 이제야 들린다. 아무리 사람모습을 하고 있어도 곰인지 여우인지 다 보인다. 사람의 몸가짐에서 무게와 교양이 드러난다. 평소의 수양과 노력 없이는 입장과 처지가 바뀌어도 적응이 어렵다. 지나보니 어떤 습용관習容觀으로 살았느냐에 따라 노후의 풍속도가 다른 것 같다.

 

삶을 꼭 득과 실로 따질 수는 없지만, 나와 남편의 친구들을 보면 그렇다.

덧셈의 깃발을 고지로 삼아 애썼던 사람들과 자유로운 영혼으로 생활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각양각색이다. 옳고 그름은 없다. 다 각자 자신의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 지금 나는 환경이나 몸무게가 넉넉해졌는데도 그다지 흔쾌하지 않다. 채우면 좁아지고 비울수록 넓어지는 이론은 뻔하다.

 

감정 있으면 말로 하라어디 말이나 마음대로 하고 살았을까.

감정에 성품을 더해야 고유한 인격이 된다. 성품을 곱게 쌓을 시간 없이 톱니바퀴처럼 돌았다.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직장이라는 그릇에 담아졌다. 콩나물시루다. 초임 때의 포부는 월급이라는 급수가 시루 밑구멍으로 다 빠져버렸다. 그동안 개성이나 취향을 존중받았을까. 매운 고추장 양념으로 콩나물다운 모양새마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직업이 짐꾼일까.

오랫동안 무거운 등짐을 지고 행군했다. “취직만 하면, 가족도 집도 건강도 나라에서 다 챙겨주는 줄 알았다는 고견은 내 남편의 말이다. 30년 넘게 근무한 직장이 적성에 맞지 않았었다고 큰소리친다. 여태까지 열심히 일했는데, 세상은 이제 와서 은근히 따돌리는 눈치다. “내가 돈 버는 기계야?” 아내에게 볼멘소리도 자주 했다. 만약 기계였다면 진작 교체 당했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직장이 자신의 존재감이었는데 지키던 보루마저 내주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 가언뜻 희망같이 들리지만, 이미 빼앗긴 사람들의 항변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누가 강과 산을 복원시켜줄까. 자연은 이미 훼손되었다. 훼손된 것을 어찌 아느냐고? 누가 알아주기 전, 몸이 먼저 반응한다. 억울한 하소연은 소리 없는 진단서와 처방전에 숫자기록만 빼곡하다.

 

서른 즈음부터 뺄셈의 삶을 배웠더라면 좀 나았을까.

서른?” 서른은 너무 빠르지 않느냐고? ‘이립而立은 인생의 기초를 세우는 나이다. 아보니 그렇다. 어쩌다 나는 운 좋게 가족과 집과 잡동사니를 가졌다. 날마다 더하고 보태느라 평생을 소진했다. 구멍이 숭숭하다. 진즉에 깨달았다면, 사귀고 싶지 않은 친구를 포기하고, 하기 싫은 일을 거절하며, 벌고 싶지 않은 돈은 벌지 않았을까.

 

우리 삶이라는 것이 사실 초등학교에서 다 완성된다고 한다.

기본이 국어 산수 도덕이다. 주제파악 잘하고, 분수 잘 지키고,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 사람다움이다. 나는 매양 주위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애간장이 녹았다. 자신을 챙기지 못하여 정서적 자산을 잃었다. 노년은 노년답고 청춘은 청춘답고 꽃은 꽃답고 개는 개다워야 한다. 국가는 국가답고 국민은 국민답고 집안이 제가齊家 답다에 어긋나면, ‘개 대접, 사람취급을 받는다.

 

나는 나답고 싶다.

 

 

 

* 류창희 : 메타논어, 타타타 메타.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논어에세이 빈빈.  매실의 초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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