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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논어> 타타타, 메타

류창희 지상인터뷰

지상인터뷰

- 수필미학기획특집 <작가 집중탐구>

 

 

↘ 수필로 등단하기까지의 계기와 과정

 

불혹, 바람이 불었다.

2000년 당시 <바람은 감각이다> <봄의 뜨락>이 부산일보와 국제신문에 실렸다. 우쭐하여 글을 제대로 쓰고 싶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나는 일주일 내내 강의를 하고 있어 문학수업은 방학동안에만 갈 수 있었다. 전날 안내 데스크에 글을 맡기고 다음 날 찾아와 퇴고했다.

 

같이 공부하는 분들이 에세이문학이라는 곳에 등단하여 따라했다.

2001년 완료 통보를 받고 수필등단 한 것을 이력서에 써도 되나요?” 물었더니 그럼, 이력서에 안 쓰고 어디다 써요!” 수필등단이 하나의 스펙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즈음, 선생님이 쓰신 수필집을 받았다. 작가에게 책을 직접 받는 것이 처음이라 사인을 부탁드렸다. 그때의 감흥이란, 훗날 내가 쓴 내 책에 내가 사인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문학 공부와 관련하여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나 만남에 대하여

 

서울로 이사했다.

분실초등학교를 다니던 두메산골 소녀에게 한 반이 70명 한 학년이 10반까지 있는 미아초등학교는 거대했다. <길음동 골목> 10분 거리에 셋째 고모님이 살았다. 2층집에 자가용도 소파도 티브이도 있다. 우리식구는 일찌감치 저녁밥을 먹고 연속극 여로를 보러간다. 방안과 마루에 이웃들이 언제나 북적였다.

 

나는 티브이 드라마보다 2층 방이 더 좋았다.

2층은 오빠들이 썼는데, 시골의 친척이나 또래의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그곳은 지적 놀이 공간, 문화 살롱salon이다. 지성과 예술로 개똥철학 달변가인 큰오빠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만화삼매경에 들 때, 나는 학원》 《여학생》 《문학사상등의 월간지를 뒤적였다.

 

큰오빠가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우리학교 2학년 선배언니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일이다. 얼마나 설레고 달콤하던지. 몰래 편지를 불에 비춰보고, 편지를 받는 언니의 표정을 살펴보고, 어느 날은 언니가 살고 있는 돌산꼭대기 쪽방까지 따라가 읽는 모습을 바라봤다. 부러웠다. 그 모습이 산같이 높고 물같이 깊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오빠와 언니는, 고작 고등학교 1학년과 중학교 2학년 청소년이었다.

 

오빠는 대학4학년 때 경향신문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었다.

대학졸업 후, 신문사 연예부기자가 됐다. 문학 안에서는 행복하였을까.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산속 통나무집으로 들어가 혼자 글을 쓰며 투병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 즈음 내게 첨부파일 메일로 동화를 보내왔는데, 검푸른 빛이었다. 오빠의 파란만장했던 행위들이 예술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쓰고 발표하는 것이 살아가는 힘이라는 것을 알뿐이다.

 

나의 문학공부는 편지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예전에 남자친구와 7년간 주고받은 편지가 아직 내방 상자 안에 있다. 편지가 오가는 동안, 저녁마다 미열에 시달렸다. 여름에 솜이불을 덮고 자도 손과 발이 시렸다. 약을 한 움큼씩 넘기며 처절한 산조가락의 잔기침소리로 이십대를 맞이하고 이십대를 보냈다. 그사이 가슴에 훈장하나 달았다. 마치 간장독 안에 핀 찔레꽃처럼 결핵의 흔적이 하얗게 남아있다. 설레며 연애편지 쓰던 시절처럼, 나의 글도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내는 연서이고 싶다. 진땀에 젖은 이부자리를 볕에 널 듯, 나의 눅눅한 마음을 원고지에서 말린다. 고해성사하듯 쓰지 않으면 더 아리고 쓰려 아라리가 난다는 것을 나는 안다.

 

 

↘ 본인 작품의 경향에 대한 자기 분석

 

작품이라고 말하려니 주제 넘는다.

위에서 말했듯이 편지 글의 발전이다.

한유는 불평즉명不平則鳴을 말했다. 편안하지 않으면 울게 되어 있다는데, 나의 유년은 한유처럼 배고프거나 춥지는 않았지만, 파란색 코로나 택시의 뒤꽁무니가 동구 밖을 빠져나가는 날이면 눈물이 나곤 했었다. 엄마의 <그리운 당신께>라는 일기장을 본적이 있다.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습관적인 그리움을 배웠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리운ㅇㅇ라고 편지를 썼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그리움을 만나는 일이다. 그리움을 행간에 써 내려가다 보면 속이 후련해진다. 내 스스로 비위를 맞추면서 나를 어루만진다.

 

나의 정서는 달빛에 박꽃이 피는 초가삼간이다.

잘 꾸며진 문보다 소박한 질에 마음이 편한 촌스러운 감성이다. 게다가 지나치게 솔직하기까지 하다. 나는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한 나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평생을 잘 다듬어진 글 한 편처럼 살고 싶다하지만, 나는 하루하루를 글 한 편처럼 살고 싶다.

 

수필은 만남, 시공을 초월하여 문으로써 만난다.

성현과 군자와 문헌과 문우와 그리고 나. 궁핍한 나의 일상을 품과 격으로 다독여 이문회우以文會友 이우보인以友輔仁의 경지로 이끈다. 나의 벗 나의 스승, 수필! 수필을 벗 삼고, 수필을 스승 삼는다. 감정의 기폭을 쓸어내리는 날,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늘 스스로 괜찮은 사람으로 마무리한다. 힘들다가도 문득, ‘수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그 또한 위로다. 위로는 셀프다.

 

, 쉬운가. 늘 원고마감 데드라인에 강박을 가지고 쓴다.

그러나 글 쓰는 일은 실제 죽고 사는 일이 아니다. 지금의 나보다 더 잘 살아볼 만큼 즐기면서 쓰자고 마음먹었더니, 원고지만 보면 즐겁다. 오호라! 즐거움은 근심하는데서 생겨야 싫증이 없나니, 즐기는 자의 고뇌와 수고로움을 내 어찌 잊을까.

 

거백옥은 나이 60세에 60번이나 변화했다.”

언제나 처음에는 옳다고 여겼다가도 마침내는 틀렸다고 말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니 지금 옳다고 여기는 것도 지난 59년 사이에 있어서는 잘못이었다고 했다.

 

이제 나도 인생을 한 바퀴 돌았으니回甲, 글도 변해야 한다.

말은 뜻이 통하기만 할 뿐辭達나는 아직도 주절거린다. 간결함이 부족하다. “, 하지 마!” ‘!’가 절실하다는 자가 분석을 한다.

 

 

 

↘ 창작과정에서 염두에 두는 주안점이라면?

 

전주 길면 연주 듣지 않는다.

첫 문장을 불쑥 치고 들어가 마지막 문단은 잽싸게 빠져나오려고 한다. 삼박하게 끝내면서 여운을 남기고 싶다. 슬픔은 코믹하게, 명랑은 유머로, 진중한 것을 가볍게, 가벼운 것을 해학으로, 여러 가지를 나열해 보지만, 오류는 꼭 인쇄되어 나왔을 때야 보이니 나의 병폐다.

 

나는 럭셔리한 것을 사랑한다.

럭셔리한 것은 부유함이나 화려한 꾸밈에 있지 않다. 그것은 비속卑俗한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비속함은 인간의 언어 중에서 가장 흉한 말이다. 나는 그것과 늘 싸우고 있다. 진정으로 럭셔리한 스타일이라면 편해야 한다. 편하지 않다면 럭셔리한 것이 아니다. 20세기 패션계에 혁명을 일으킨 코코 사넬의 스타일이다. <나는 럭셔리하다> 삶의 스타일도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비속하면 안 된다. 글도 그렇다.

 

나는 아름다움을 사물이나 관념에 두지 못한다.

내게는 아직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심성이다. 나의 글은 내 마음을 상하지 않게 다독이는 글이기 쉽다. 언제든 사람을 중심에 둔다. 글이 부드러워 마음을 손상시키지 않으며, 복잡하기는 하지만 재미있어 읽어볼 만한 포정해우庖丁解牛같은 글을 쓰고 싶다. 뼈와 살 사이의 틈을 젖히는 펜 다루는 솜씨를 갈망한다.

 

그럴싸한 사설을 늘어놓았지만, 어림없다.

이론에 대해 말하라면 자신이 없다. 국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이론서를 내 키만큼 쌓아놓고 읽지도 않았다. 같이 모여 문장을 연구하고 합평하는 모임도 없다. 스승도 본도 왕도도 없다. 매번 이 글 발표해도 되나, 불안하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믿는다. “유치한 것을 유치하지 않게, -한 것을 뻔-하지 않게내 안에서 나만 바쁘다. 성에 차지 않는다. 할 수 없다. 또 쓰는 수밖에.

자득을 말하고 싶다. 나는 내 글에서 내가 배운다.

 

 

 

↘ 논어 등 고전을 연구하게 된 계기와 그에 따른 사회에서의 활약에 대하여

 

선산이 삼태기처럼 마을을 싸안은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사랑채에서 할아버지의 특유한 가락으로 ~구성진 음률은 기품이 서려 지엄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글을 읽으리라.’ 마음먹었다. 오늘의 나는 할아버지 흉내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논어를 강독하고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눈길을 슬쩍 피한다.

그만큼 나는 가볍게 보인다. 실제 몸무게도 남보다 가벼웠다. 어느 분은 대놓고 어쩌면 그렇게 고상하게 놀아요?” 그 뒤에 후렴처럼 젊은 여자가”, 여운을 남긴다. 사모관대의 의관을 갖춘 남정네들의 영역이지 아녀자의 치마폭이 아니라는 눈치다. 논어는 그만큼 사대부 대접을 받아왔다.

 

논어교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종심의 나이 칠십 대를 넘은 분들도 있지만, 이제 막 불혹을 넘긴 이들이 대부분이다. 군자가 어디 따로 있을까. 내가 아직 며느리, 아내, 어미, 주부로서 살고 있으니, 그 역할 안에서 공자님을 만난다. 이 세상의 제아무리 높고 깊은 사상이나 학문이라도 나로부터 시작한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읽은들 무엇에 쓰겠는가.

 

사람들은 고매한 공자보다 만만한 성인을 만나고 싶어 한다.

~ 공자님도 사람이었네혹은 논어가 어려운 것인 줄 알았는데 재미있다, “쉽다며 시시각각 웃음소리가 설사처럼 터진다. 웃음은 결코 가볍고 보잘 것 없는 우스꽝스러움이 아니다. 웃음 끝에 눈자위 붉어지며 자신만의 카타르시스로 고된 삶을 씻어낸다.

 

어느 누이가 몇 년을 수강하더니 사남매를 모아 일주일마다 함께 듣는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부모님 말씀 같다고 한다. 결혼한 딸과 친정어머니 모습은 푸근하다. 자매들이나 여고동창, 혹은 같은 고등학교 출신 은행 간부들이 단체로 수강할 때는 뭔가 그럴듯한 예문을 들려고 애써 본다. 퇴직한 교장선생님, 대학교수, 의사, 국회원내대표 앞에서도 수업을 했다. 그렇다고 그분들에게 무슨 커다란 사상을 전달했겠는가. 강사의 익살이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고전古典을 고전苦戰해서 읽지 않는다. 한자 능력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 일본어나 중국어에 도전하는 생활언어, 고전으로 마음을 수양하고 싶은 분, 동기도 목적도 각각 다르다. 간혹 이해할 수 없는 분들은 한 권의 책을 가운데 놓고 나란히 앉은 부부다. 이 분들은 내게 화성 금성을 떠난 또 다른 별, 별꼴 별나라다.

 

어느 해, 도서관 담당직원이 전천우시잖아요.”라며 소외계층 평생프로그램을 맡겼다.

얼마든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오히려 오만한 기대로 설레기까지 했다. 당연히 의자가 모자랄 것이라 여겼다. ‘한 사람, 단 한 사람 앞이라도 열과 성을 다하겠노라는 애초의 생각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세 명이 오도카니 앉아 뭘 갤킬거냐?” “밥은 언제 주느냐?”고 묻는다. 아마 강의를 들으면 밥을 준다고 한 모양이다. 두 시간 동안 진땀을 빼고 나오는데, 산기슭 밑 복지관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에게 오늘의 목표는 한 끼 밥이다. 사서삼경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느 누군들 녹록한 숟가락만 있었을까. 엇박자로 빗겨간 세월을 따라 울고 웃다가 종강 날 모두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반년의 기간이 내겐 반평생의 업적처럼 벅차서 울었다.

 

나의 수업은 독창이 아니다.

아마 내 수준이 작아서 작은 이야기만 하는 것 같다. 한문은 어디 갔던지 한글을 모르는 분들이라고 일부러 쉽게 설명하려고 애쓰거나, 학식이 많은 분들이라고 하여 고담준론의 겉멋을 피한다. 가장 많이 무너뜨리는 사람은 내 남편 내 자식의 이야기다. 선생 따로 학생 따로는 없다. 언제나 함께 아리랑합창의 하모니다.

 

 

 

↘ 논어 강의나 논어에세이 『빈빈』 출판 등의 활동에 관하여 - 자신의 글쓰기에 미친 영양과 보람

 

부산시민을 대상으로 논어를 강독한지 20년 차다.

그동안 시민도서관 해운대도서관 구덕도서관 구포도서관 반송도서관 부전도서관 연산도서관 사하도서관 서동도서관 명장도서관 금정도서관 다대도서관 동구도서관 반여도서관 메트로도서관과 부산 인재개발원 부산일보 퇴계학 부산연구원 등등에서 수업했다.

 

나는 옳은 선비도 아니요, 학자는 더더욱 아니다.

내 어찌 그 옛날 춘추전국시대 성인의 말씀을 학문으로 전하겠는가. 그저 내가 앉을 자리, 설 자리, 나설 자리, 물러설 자리를 구별하며 한 구절씩 읽는다.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본문은 논어집주안에 다 있다. 내가 하는 일은 이웃들과 내식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그 문구가 여기에 있다고 안내만 하는 역할이다. 결국, 인문학은 사람 사는 이야기다.

 

나는 제도권의 잘 갖춰진 이력이 없다.

당시 부산 퇴계학 연구원의 부원장님이던 이동녕교수께서 류선생, 문학을 하려거든 논어를 읽으시게.”권하셨다. 그 후, 나는 논어수업을 숙명처럼 하고 있다.

 

살면서 사람관계가 어렵다.

서운하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등을 돌리는 배반도 당한다. 나는 공부를 믿는다. 공부가 나를 버린 적은 없다. 태산이 높다하되 오르고 또 오르면, 오른 만큼 이익이다.” 십 수 년 전에 강의실에서 만났던 분이 국문과나 중문과에 편입했다든지, ‘한자 방이나 포털 사이트 한자 왕또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되었다고 찾아오면, 그들의 해냄을 존경한다. 나또한 그렇게 공부했으니깐. 인재개발원에서 퇴직예정 10, 입사 10, 공무원들에게 2인생 설계과정강좌를 할 때 뿌듯했다.

 

어느 해, 스승의 날을 즈음하여 오십대의 남자분이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강의실로 들어왔다.

당신은 누구시길래…♬아내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아내가 생전에 손수 써서 만든 한자 급수교재와 유품으로 남겼다는 한지부채에 궁체로 쓴 작품이다. 아내의 유언대로 우리 고전산책반에 떡과 식혜까지 부군께서 준비하셨다. 봄 학기에 밥을 낼 거라 하시더니, 밥 대신 부음의 향촉香燭내음이 배인 떡이다. 그 어떤 문구가 우리에게 더 필요할까. 무슨 처세를 더 익힐 거라고 논어를 읽을까. 나는 망연히 건조하게 바라봤다. <마지막 수업>처럼 가고 없는 저 세상의 넋이라도 찾아오는 수업이다. 혈연 지연 학연이 만연한 세상이다. 부모자식 간이나 부부 간에도 영원한 것은 없다. 하물며 석 달씩의 학연이 무슨 심지가 있을까. 부평초처럼 뿌리 없이 강사 따라 쫓아다니는 보따리 인연이다. 그래도 십 수 년 된 분들이 도서관 곳곳에 대들보처럼 지키고 계시니 나는 강의를 놓을 수가 없다.

 

수필등단은 운전면허증과 같다.

그 면허증으로 어느 속도로 어디를 가든 자유다. 매실의 초례청을 내고나서 초조했다. 매양 같은 붕어빵을 굽게 될까봐. ‘논어를 손에서 놓기 전에현장에서 써야겠다는 조바심이 생겼다. 논어는 너무 큰 이름, 너무 큰 학문이라 두들겨 맞을 각오로 시도했다. 많이 어긋났을 것이다. 내가 공자님을 저버리지 않는 한, 공자님은 절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을 믿으며 서문을 썼다. 꿈꾸던 사서司書는 사서 고생한다더니, 사서四書의 언덕에서 논어 문구에 매달려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내가 아니면 누가,

논어의 군자 상을 닮은 넓고 깊은 작가가 되길기도해주신 이해인 수녀님. ‘역사 이래 지구상에서 인간에 대하여 공자님보다 더 꿰고 있는 분이 어디 있나. 그런 분을 스승으로 찜해서 짧지 않은 세월 동고동락하는 류 작가는 정말 인생의 터를 잘 잡은 행운아라고 응원해 주신 홍혜랑 선생님의 리뷰와 생전에 동료!”라고 불러주셨던 허세욱 선생님의 호칭에 안도했다. 그야말로 나는 행운아다. 무엇보다 각 도서관에서 시민들과 함께 나누는 논어문구를 내가 오지게 배우고 있다. 만약 논어 에세이를 책으로 엮어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스무 해 동안 발품만 판 일개 강사로 끝났을 것이다. 나만의 고유브랜드로 글을 쓰고 싶었다. 논어에세이 빈빈‘148.3_KDC5’ 철학서로 분류번호를 받고, ‘2015년 세종도서 문학 나눔으로 선정되었다. 책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어록을 남겨주신 공자님께 문학의 사명으로 국궁鞠躬의 예를 올린다.

 

 

 

↘ 수필로 고마웠던 일, 혹은 유감스러웠던 일 한 가지씩 꼽으라면?

 

- 고마운 일

날마다 고맙다.

내가 글을 쓰지 아니했다면 옷깃을 스칠 리도 이름을 알리도 없는 고명한 분들과 편지로 이메일로 전화로 어찌 소통하겠는가. 무엇보다 원고청탁서를 보내주는 잡지사의 고마움에 오늘도 책상 앞에 앉는다.

 

내 글을 읽으며 지나치게 솔직하여 거북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책을 내고 나면 손 편지나 메일 문자 요즘은 편리하게 카카오 톡도 많다. 즉시 연락하는 분들은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이기 십상이다. 인사를 놓칠까봐, 의례적인 답례다. 메일을 보낸 시간이 오밤중이거나 새벽녘에 문자를 보내오는 분들, 이분들은 밤새 문학에 대한 성찰로 잠 못 이룬 분들일 것이다. 어느 분은 대낮에 전화를 해놓고 일단 엉엉 운다. 나는 왜요, 괜찮아요.” 괜찮다고 밑도 끝도 없이 말한다. <아버지의 방><차라리 막대 걸레를 잡겠다> <엄마의 딸> <옛날의 금잔디> 등이다. “나 좀 울게 내버려 둬요” <손을 말하다>는 여러 통의 사연을 받았다. <베풀지 마라>는 안타까워 목소리가 애절하다. “저는, 괜찮아요.” 그렇다. 괜찮고 싶다. 나는 벌써 명랑모드다. 내 이야기가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다.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 남자들은 시샘이 없다.

담배 사러 나왔다가 서점에 갔다가 또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봤다는 <속알머리> <여자 & 남자> <별을 품은 그대> 주로 유머와 해학 쪽에 편을 들어주는 분들이다. 남자끼리도 조심스러운 내용을 갑자기 치고 들어와 방어하지 못하고 읽었다며 아주 억울해 하는 독자들이다. 그분들의 응원에 오늘도 연필을 깎는다.

 

 

- 유감스러운 일

글은 주관적이다.

내 글을 보면서 어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도 다 좋고 착한가?”묻는 이들이 있다. 나는 사람들의 좋은 점만 보는 버릇이 있다. 장점으로 교류한다. 만약 어느 분이 일부러 나에게 나쁘게 한다면, 그에게 정중하기만하면 된다.

 

그런데 물리치지 못하는 부류가 있다.

자식이다. 사생활을 보장해 달라는 거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을까.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져주는 거다. 신가정의례준칙을 정해줘도 자식은 방탄에서 온 소년단들이다. 그들의 말과 몸짓이 백번 맞다. 세계 사람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나를 사랑하라는 철학적인 노랫말에 열광한다. 자식이 뭐라고? 아이들 앞에 희생양이 되어도 내 몸같이 여기는 착각동체들이다. 그들의 정체를 지면으로 실명까지 거론했으니, 어미가 자식의 명예를 실추시킨 셈이다. 그럴 때, 글을 그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머리로는 지지!” 하면서 손가락은 자판 위에서 더 속도를 낸다.

 

 

 

↘ 지금까지의 문단 활동에 대한 회고

 

영국을 닮고 싶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로 글을 쓰며 웬 영국타령인가. 등단을 에세이문학으로 했다. 문학 행사장이 당연히 서울이다. 평일에 열리는 봄가을 세미나도 참가하기 어렵다. 부산지회가 있다. 그 마저 여의치 못하다. 내가 속한 단체에 나는 연회비만 잘 내는 회원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문단활동에 적극적이지 못하다. 그들과 꽃그늘 아래에서 함께 웃으며 사진 찍지 못했다.

 

영국이 부럽다.

유럽연합에서 나갔다. 유로를 쓰지 않고 파운드를 쓴다. 역시 대영제국이다. 시도 때도 없이 SNS로 날아오는 우스갯소리 의정활동 동영상 등을 본다. 코드끼리, 라인끼리, 우리끼리, 끼리끼리라는 단체우리에서 나가기버튼을 누를 용기가 내겐 없다. 나는 파운드의 가치에 버금가는 문격文格이 모자란다. “군자는 두루 마음 쓰되 무리지어 편 가르지 아니하고, 소인은 편을 가르고 두루 마음 쓰지 않는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로 억지위한을 삼는다.

 

때론 무소속이고 싶다.

이기적인가? 회비는 빨리 낸다. 등록금을 안 내면 제적된다는 사실을 소싯적에 겪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무리 속에서 성장할까. 과연 성장이 내가 바라는 목표일까. 스티븐 킹은 글쓰기는 인기투표도 아니고, 도덕의 올림픽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다.” 저자는 차고 넘치는데 작가는 희소하다고 한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

 

나의 꿈은 사서였다.

길음동 육교 밑의 작은 책방을 드나들며 꿈을 키웠다. 사서과정을 수학했으나, 도서관근무를 하지 못했다. 지금 도서관마다 다니며 강의를 하는 것은 꿈 너머 꿈을 이룬 자칭 라이브러리언이다. 이덕무가 백탑 아래서 벗들과 지내듯, 오로지 내가 나를 벗 삼던 간서치같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애지중지 글 상자를 전해주는 유득공은 누구고, 따스한 눈빛으로 지켜봐 주는 박지원은 누구인가. 부족한 덕으로 인하여 글벗들을 잃을까, 늘 노심초사한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봄 햇살처럼 <따뜻한 외로움>으로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는 궁색한 절규다. 나도 누구에겐가 따뜻한 벗이 되고 싶다.

 

 

 

↘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의 방향

 

논어 에세이 2’를 준비하고 있다.

빈빈을 발간한 이후 에세이문학논어야 놀자그린에세이공자 가라사대퇴계학 부산연구원 소식지에 유학수필을 연재하고 있다. 글의 편수는 얼추 찼으나 학문과 글발이 걱정이다. 고전이 박제된 문헌 속에서 박물관이나 도서관 서고에 박혀있는 장식 보관물이 아니기를, 한 문장 문장이 내 나라 내 고장 내 이웃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문화이기를 바란다.

 

네 살배기 손자 바하는 할머니가 글을 모르는 줄 안다.

나는 언제나 큰일 났네, 할머니가 아직 글을 못 읽어영어도 모르고, 중장비고 모르고, 스포츠카도 모르고, 공룡이름도 모르지. 바하가 잘 배워서 할머니에게 가르쳐 줘야 돼. “~, 할머니나에게 목이 쉬도록 설명하며 생색낸다. “아유, 힘들어이게 어려워요, 잘 들으세요. 비행기를 타면 승무원 이모에게 주스 플리즈, 땡큐티라노사우루스는 최고 사냥꾼이고, 포클레인을 삽차라고 해요. 스포츠카는 파랑색이 가장 빨라요.

 

글 모르는 할머니를 위하여 할머니, 전갈은 독침이 있어요. 봐요하며 내 팔을 꼬집는다.

아야!” 이게 엄청 아파서 위험하니 안전교육을 해야 해요어린이집에서 돌아오자마자 헉헉거리며 미세먼지, 지진, 세균 등 안전교육부터 시킨다. 단지 나에게 배우는 것은 주방 싱크대 앞에서 오이나 당근 껍질을 까고 두부나 곤약을 써는 것을 함께 한다. 그때 나는 밥상 차리는 할머니로써, 칼날의 서슬을 만지게 하고, 뜨거운 것을 손대게 하고, 생선냄새를 맡게 하고, 매운 맛 신맛 쓴맛을 음미하게 한다. 곧잘 알아듣는다. 이제 네 살이니, 소학의 나이 8세가 되면, 사자소학》 《추구를 교본삼아 동화수필도 쓰고 싶다.

 

 

 

↘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

 

착각은 자유다.

이글 지상인터뷰를 쓰는 동안, 친정어머님이 해리현상정동장애가 왔다.

지상인터뷰원고청탁을 받고 일주일에 서울을 네다섯 번 오르내리다가 아예, 부산으로 모셔왔다. 날마다, 배고프다. 춥다, 덥다. 심심하다. 졸리다. 영안실을 너 혼자 지킨다느니, 죽었다 살았다 이승과 저승놀이 삼매경이시다. 매일 체온을 웃도는 폭염, 오늘은 엄마가 나를 낳은 날이다. 그분께서 아기가 되어 내게로 오셨다. TV에서 노인학대 1순위가 가족이라는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엄마의 일생을 보고 자라, 뙤약볕에 바랭이풀꽃 양산도 못쓴다는 <엄마의 딸>이다. 이 글을 탈고하면서 죄책이 무겁다.

 

수필이 경제적으로 밥이 되지 못하니 직업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 글을 쓰며 자신을 곧추세운다. 모네의 아내가 숨을 거둘 때, “내겐 너무도 소중했던 한 여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이제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저는 너무 놀라고 말았습니다. 시시각각 짙어지는 색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임종을 맞는 카미유 모네> 주검이 변하는 색상과 모습을 화폭에 담은 모네를 향하여 미친놈!” 이라고 욕할 수 있을까. 어느 상황에서도 글을 쓰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다. 오로지 쓸 뿐.

내 마음의 안전기지. , 글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 류창희 : <메타논어, 타타타 메타>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논어에세이 빈빈> <매실의 초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