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론
- 《수필미학》 기획특집 <작가 집중탐구>
법고와 창신의 글쓰기
- 류창희의 수필세계
허상문 *
1
‘법고창신’法古倉新은 《논어》에 나오는 ‘온고지신’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며 문학 창작의 중요한 정신이 되어 왔다. ‘법고’란 옛것을 본받은 것을 말하며, ‘창신’이란 고전이 가해왔던 구속으로부터 해방하여 문학적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다. 법고 창신의 문학정신에 많은 지침을 준 연암 박지원의 지적대로 ‘창신’이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창제함으로서 상도常道를 벗어나기 쉬운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새로이 창제하면서도 법을 지킬 수 있다면, 이것이 삶과 문학에 있어 새로운 인식과 창작 태도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물론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전에 기대어 억지로 권위를 가장하고 위엄을 뽐낸다는 것은 문제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고전의 참뜻을 최고의 저자에 의해 저술된 훌륭한 저작으로 인정하며 그 속에서 참다운 인생과 세상의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다. 이를테면 동양의 고전으로 《논어》, 《맹자》, 《시경》을 비롯한 사서육경四書六經을 통하여, 그리고 서양의 고전으로 플라톤의 《향연》과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통하여 그 속에 담긴 진정한 인문학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쓰인 시대와 사회를 넘어서는 보편적 세계의 진리와 인생의 의미를 읽을 수 있을 때, 그 고전적 의미는 온전하게 살아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류창희의 수필집 《매실의 초례청》, 《빈빈》, 《내비아씨의 프로방스》(이하 이 책들로부터의 인용은 작품명만 밝힘)를 두루 읽으면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의 수필이 성취하고 있는 문학적 새로움이 무엇보다도 종래 우리 수필이 전통적으로 간직하고 있던 법고를 넘어 창신을 이루고자 하는 정신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류창희 수필은 그동안 우리 수필 문학이 주제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안주해온 개인 삶의 기록에 만족하는 장르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수필 문학이 교훈적 규범적 성격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쓰이고 읽혀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이 현재와 미래의 인간과 삶이 지속적으로 지녀야 할 생명력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
2
류창희의 삶과 문학에 대한 태도는 논어 에세이 《빈빈》의 전반에 잘 나타나듯이, 논어 읽기를 통해서 세상 이치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20년 동안 부산의 여러 시립도서관에서 논어 강독을 하면서 삶의 이치를 가르치고 깨우친다. 논어 강의를 하면서 “내가 앉을 자리, 설 자리, 나설 자리, 들어설 자리”를 구별하고, “때론 펄펄 뛰는 고등어가 되고, 안간힘을 쓰며 일하는 개미가 되며, 재주넘는 다람쥐기가 되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숭이가 되”면서 매일 논어를 읽는다고 작가는 말한다.(<따뜻한 외로움>). 《논어》에는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다 들어있다. 《논어》 강독을 하면서 그가 하는 일은 식구와 이웃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알아가는 일이다. 그러면서 그는 공자의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라는 말대로 세상 사람들과 공감코자 한다.
《논어》에는 “널리 배워 뜻을 돈독하게 하며, 절실하게 질문한다.” “배움만 있고 생각이 없으면 망령되고 생각만 있고 배움이 없으면 위태롭다.”는 말이 있다. 《논어》에서 ‘학學’이라는 글자를 중심으로 논해지는 사상은 바로 오늘날 ‘학문’의 의미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때 질문과 생각은 학문의 ‘문問’에 대응된다. 즉 《논어》는 어떤 지식이든 항상 의문과 의심을 하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때에 참된 나의 지식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공자의 가르침대로, 류창희는 <고전의 향기>, <밥 먹는 것도 잊다>, <학운學運에 중독되다>, <문학을 하려거든> 같은 여러 작품에서 학문(문학)에 대하여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하여 작가는 공부를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는 ‘욕파불능慾破不能’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한다. 선비란 결코 ‘놀고먹는’사람이 아니라 바른 마음을 가지고 널리 배우되 예禮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류창희가 그의 삶과 문학에서 강조하는 것도 바로 공자가 이야기한 이런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정신이다.
그때, 내가 냄새라고 여긴 그 향이 사무치게 그리워 나는 지금 논어를 읽는다. 그 정서에는 도덕이 있고 예가 담겨 있다. 그 힘은 무엇일까. 기질이라고 하자. 그렇다고 선비가 읽던 경전들이 운치가 있고 멋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어제만큼도 나아감이 없는 공부가 힘이 들어 마음이 탄다. 하루아침에 익혀지는 것이 아니다. 문文과 질質이 곰삭아야만 제 맛이 우러난다.
-<고전의 향기>에서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지만, 이 말은 마치 어떤 절대적인 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도에 대한 인간의 다짐과 자세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무릇 학문이란 세상의 도에 대해 배우는 것일진대, 정작 우리가 책을 통해서 도를 배우지만 세상에서 그 도는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 세상에 도가 실현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 사회는 혼돈과 무질서가 거듭되는 것은 아닐까. 공자의 시대에서나 지금이나 무도無道의 상태가 심하기 때문에 도를 세우려는 노력이 유의미하게 된다. 혼란스러운 세상을 개혁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도를 세우는 有道’ 일이다. 도를 세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법이 공평하게 제정되고 제정된 법은 공평하게 집행되어서, 원칙과 상식이 통하고 편법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도가 서 있는 사회’이다. 그것은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할 줄 아는 평범한 진리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우리가 아기 때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온 이야기지만,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를 작가는 다음과 같이 꼬집는다.
‘지지’ 지지(知止), 그칠 때를 알아라.
지지는 본능의 반응이다. 아기일 때부터 듣고 자란 입말 ‘지지’를 잊고 사는 동안, 내 양심의 규방은 비어 있다. 본 마음은 외출 중이다. 어디에 갔나. 저런~! 행랑채에 손님과 노닥이고 있다. 어느 불청객은 벌서 내 방에서 떡 하니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그들의 이름은 ‘주•색•재•기酒色才氣’다. 술손님, 호색손님, 재물손님, 건강손님이 내 방에서 서성이며 나를 알아서 잘 모시라고 엄포를 놓는다. -<지지>에서
작가의 말대로 “술손님, 호색손님, 재물손님, 건강손님이 내 방에서 서성이며 나를 알아서 잘 모시라고 엄포를 놓는” 동안에 우리는 진정한 인간다움의 도를 놓치고 있다. “그칠 때를 알아라.” 이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 노자의 말대로 명성과 생명, 생명과 재화의 어느 쪽도 심히 애착하면 반드시 크게 소모하고, 재화를 많이 간직하면 반드시 엄청나게 손해를 본다. 분수를 지켜 자기 능력의 한계에 머물 줄 알면 언제까지나 편안할 수 있다. 이것을 삶에서 실행하기가 그렇게 어렵게 때문에 사람들은 오늘도 고통과 불행에 빠져 힘들게 살아간다.
공자는 군자의 덕성으로 무엇보다 인仁을 강조했다 "살신성인殺身成仁한다.“는 흔한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은 쉽게 이룰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의 덕목이다. 또한 인은 효孝, 충忠, 지혜智, 용기勇, 예禮, 공恭과 같은 모든 덕목을 포괄하는 완전한 덕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그런 것처럼 공자는 당시 사람들이 예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까닭을 모두 그들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욕구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예를 실천하려면 반드시 ‘극기克己’해야 한다. 극기는 ‘예’로써 자기의 욕망과 싸워 이기고 극기할 수 있다면 자연히 예를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이란 우리 마음이 진실하면서도 예에 맞는 발로이니,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을 헤아리는 것이다. 자기를 존중하듯 남을 헤아리고,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 인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인이 멀리 있다고 여기는가? 내가 인을 바라기만 하면 인은 바로 곁에 있다.” 라고 말한다.
류창희는 삶과 문학을 통하여 ‘인’과 ‘예’를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듯하다. “누군가에게 인仁을 실천하고 싶은데 가진 것이 없고, 사랑을 나누고 싶지만 마땅한 상대가 없으며, 공부하고 싶어도 두뇌가 명석하지 못하고, 운동하고 싶으나 시간이 없다고 이런저런 핑계를 다 대지만, 다 마음에서 멀기 때문”(<산앵도나무 꽃이여!>)에서 하는 말이다. 또한 “남에게는 너그러운 척해도 정작 보잘것없는 내 자존심을 지키려고 바늘귀구멍만큼의 틈도 주지 않는다. 착해 빠지고 조금 덜떨어진 사람, 조금 모자라는 사람으로 살면 어떤가. 이제 더 얻고 더 잃을 것이 무엇인가”(<감성, U턴하다>)고 묻는다. 이런 마음들은 모두 인과 예를 실천하는 마음에서 소홀함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천하는 마음은 작은 일상적 삶에 대한 실행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작가는 일상적 삶에서도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를 삼아도, 그 속에 즐거움이 있다 의롭지 않은 부와 또 귀한 것은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는 공자의 말을 상기하며 이를 실천하고자 한다(<설령, 거친 밥을 먹더라도>).
옛 선비들은 정치, 경제, 철학 등 세상사를 통달하는 ‘통유通儒’가 되기 위해 널리 배우고 많은 것을 익히고자 했다. 알고 있는 것이 많아야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많이 생각하고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신’이전에 옛것을 이해하는 ‘법고’가 선행되어야 한다. 통유의 반대말은 아는 것이 부족하고 식견이 짧은 궁핍한 선비, ‘궁유窮儒’다. 아는 것이 적은 사람은 본인이 아는 것만 세상 전부인 줄 알고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다. 많이 아는 사람 눈에는 모든 것이 다 옳고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조금 아는 사람 눈에는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법이다. 법고 창신의 관점에서는 옛것을 모범으로 삼되, 그 내면에 담긴 뜻과 장점을 안 후에는 더는 그것에 얽매지지 말고 새로운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추구해야 통유의 경지에 이를 수 잇을 것이다.
류창희에게 있어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그는 삶과 문학에서 동시에 궁유를 벗어나 통유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이 그대로 삶으로 다 구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이는 모든 학자가 다 성현의 도를 체득하고 이를 실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학이 도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움과 익힘, 그리고 그에 수반되어야 할 정신적 깨달음의 과정이 필요하다.
류창희의 수필 전반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문학과 삶, 삶과 문학의 실천은 존고를 강조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여기에서 존고란 단순한 복고가 아닌 박고博古이며, 상고尙古의 의미를 갖는다. 공자도 “실로 학자는 마땅히 옛것에 박식해야 할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옛것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거니와, 이러한 법고 창신의 태도는 옛것을 수용하는 데 문호를 개방하고 종합적인 객관성을 지니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수단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정신과 가치를 평정하는 주체성을 갖는 가운데 성립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류창희의 작품에서 우리가 흔히 읽을 수 있는 정서의 하나는 그리움이다. 이런 그리움의 정서란 수필 문학을 위시한 많은 문학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류창희의 경우 이것이 삶과 문학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의 작품에서 그리움은 빈번히 삶의 시원에 대한 모티프로 작용한다. 작가는 문학과 삶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옛날의 올바른 모습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과 삶의 본질을 반성하고 성찰하고자 하는 태도이며, 인간과 세상의 근원을 탐색하고자 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빗금>에서 화자는 날마다 달력에 빗금을 치면서, 그것이 “지나간 날에 대한 안도감보다는 다가올 날에 대한 준비”라고 말한다. 또한 빗금을 치는 것은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 늘 그리워하는 마음의 안식처”를 향한 소망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빗금은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안도의 한숨만은 아닐 것이다. 새롭게 도전하는 또 다른 기다림일는지 모른다. 근무같이 여기는 일상에서 벗어나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 늘 그리워하는 마음의 안식처. 그곳은 어쩌면 문학의 텃밭일 게다. 날마다 치는 빗금을 빌려 사유思惟의 뜰에 호미를 들이댈 일이다. - <빗금>에서
어머니가 ‘이월매조’를 그리워했듯,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 수업이라고 작가는 생각한다.(<이월 매조>). 또한 이런 그리움은 바로 마음의 안식처인 ‘문학의 텃밭’과 같은 것이라고 여긴다(<빗금>). 그의 작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아버지의 방>)의 정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실제 류창희 작품에서 근원에 대한 그리움의 표출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리움의 정서가 특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여기 현대의 우리와 무한히 멀리 있는 세계에 대한 동시적 모색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며, 무한히 멀리 있으니 지금 여기의 우리가 쉽게 손을 뻗어 다가갈 수 없는 세계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이고 미래이며 시원인 까닭에 더욱 도달하기 어려운 곳이다. 이와 같은 그리움의 정서를 통하여 작가는 지금의 현재 세계로부터 과거로의 회귀를 거듭한다. 작가에게 이것은 시원의 세계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며 낯선 세계를 찾아가고자하는 새로움의 갈구이다. 이러한 정서는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본질적 정서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그리움을 만나는 일이다. 그리움은 나에게 어떤 한恨 같은 정서를 남겨 주었다. 울컥울컥 그리움을 행간에 써 내려가다 보면 속이 후련해진다. 내 스스로 비위를 맞추면서 나를 어루만진다.”(<욕파불능>)고 말한다.
형언할 길 없는 그리움의 정서는 류창희 수필에서 남루한 일상을 초월적으로 건너가게 한다. 지상의 삶은 궁핍하여 남루하기 이를 데 없다. 이와 같은 궁핍한 시대를 건너가야만 하는 것이 지상의 존재인 우리가 걸어야 할 숙명의 길이다. 이런 숙명의 길 위에 서 있는 우리에게 그리움의 마력은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쓸쓸하게 동반자가 되어 궁극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궁핍하고 남루한 삶을 남루하지 않게 건너고 있는 류창희의 수필은 지금 여기, 그리고 저 머나먼 곳에 있는 운명을 견뎌내어 초월하도록 유인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의 수필은 일상적 거리와 초월의 거리를 오가면서 삶을 새로운 지혜와 초월로 이끄는 힘과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에게 그리움은 해탈이며 초월의 미학일 수도 있다. 류창희의 수필이 구축한 그리움의 미학은 그의 시학의 모티프이며 지향태이기 때문에 그가 머문 흔적 곳곳에서 우리는 삶의 지혜와 진리를 만난다. 비록 그리움의 한편이 다소간에 적나라하여 서글픈 우울을 심화시킨다 해도 그 힘과 유인력은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계기로 작용한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류창희의 문학정신은 그의 사고체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그는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하고, 또한 지식을 통하여 사물에 대한 이치의 깊이를 더해가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실현코자 하는 듯하다. 그가 수필작품을 창작하는 원리나 담고자 하는 주제는 고전을 공부하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보인다. 경전에 대해 실증적힌 훈고를 중시한 것처럼 수필창작에도 그러한 정신을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 편으로 옛것을 모범으로 삼아 그 내면에 담긴 뜻을 파악하면서 인간과 세상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가치를 터득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므로 류창희 문학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인간이 따라야 할 규범과 가치를 정신으로 삼아 이를 함께 아우르는 학예 일치의 경지에 도달코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문학은 단순한 여기나 기술이 아니라 도를 실현하는 중요한 방편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작가의 이런 태도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단순한 개인적 공감이나 사랑으로 채색돼 공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이런 감정을 덜어내 인간의 본질적 규범과 윤리를 위한 공간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감정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윤리나 도덕에 대해서 작가가 선택한 가치에 가깝다. 작가가 선택한 가치란 선택하지 못한 가치를 감당해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진짜 문제는 선과 악, 혹은 윤리와 비윤리 사이에서 배회하고 외면하는 가운데 그 어떤 가치도 쉽게 선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 결과를 감당하기 싫어서 우리는 아예 선택 자체를 외면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과 사회는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게 되고 올바른 선택은 언제나 공전空轉한다. 거칠게 말해 문학은 왜곡되고 파괴된 행복의 약속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란 나름의 올바른 선택적 방식으로 아름답고 진실한 삶의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며, 새로운 세상을 위한 정신적 지향으로 존재하는 것이 문학작품이다. 이런 의존은 좁게 보면 문학작품을 통해 어떤 개인의 실존적 근거를 부여하게 되고, 넓게 보면 정치•사회•문화의 제 분야에서 정합성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류창희 문학은 동양 고전이 보여주고 있는 이성의 내면성을 통해 성찰의 도덕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문학을 통해 하는 일은 일종의 문학적•철학적•지적 작업이며, 자기 성찰적이고 자기 비판적인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의 초점은 일정한 지적 사고의 수행자로서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반성의 수련을 통해서 우리를 에워싼 삶의 조건을 진단하고 어떤 새로운 인식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하여 고전을 통해 실존적 삶의 현실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성찰을 이루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은 깊은 떨림으로 다가온다. 요컨대 류창희 수필은 고전이 이룩해놓은 보편성의 원리를 포용하면서 동시에 이를 현실적 사유의 원리로서 다시 파악하고자 하는 의의를 지닌다.
4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새것이 등장하고, 많은 경우 이 새것이 창의적이고 아름다우며 시대와 유행을 선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심지어 우리에게 새것은 반드시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로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새것이 반드시 의미 있거나 중요한 것만은 아니며, 오래되었지만 빛나거나 가치 있는 것도 허다하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고전古典이다. 문학적 의미에서 고전은 단순히 오래된 전범이란 의미를 지니지만, 시대를 대표하며 후세인의 모범이 될 만한 가치를 지닌 작품을 뜻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이든 고전에는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변함없는 가치가 담겨 있다. 진정한 고전은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낡지 않으며 유행을 타지 않는다. 고전에는 일시적 표피에 반응하는 쾌감이 아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관통하는 보편적 진리와 내부까지 파고드는 진실한 아름다움이 찾아질 수 있다. 이 말은 곧 고전을 통하여 진선미에 대한 가치의 영속성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부터 서구의 가치관으로 유행했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념은 우리의 기존 가치관을 송두리째 휩쓸어 버렸다. 이것은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연속성으로서의 세계 이해에 대한 가능성을 탈취하면서 일방적으로 현재에 대한 인식만을 강조하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일은 옛것을 보존하고 존중하면서 새로운 삶의 가치와 정신을 회복하는 일이다. 옛것에서 미래를 보는 심미안을 가진 작가들은 ‘오래된 미래’같은 문학과 예술 창조를 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류창희의 수필은 내용과 형식에서 기존 수필을 존중하면서도 고전 읽기를 통하여 수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이루고자 한다. 그에게서 고전을 이해한다는 것은 학구적이고 논증적인 방식을 통해서 고전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것임은 물론, 더 나은 삶의 방식과 진의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류창희가 복고를 말하고,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삶과 문학의 전형을 찾고자 하는 것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진리와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것이지 단순히 고전적 전형을 답습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류창희는 이 양쪽을 모두 수용하고 조화하는 입장에서 법고 창신의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의 수필의 많은 부문은 논어 읽기와 같은 고전에 기대있으나, 그것이 결코 고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의 상황에 적합한 내용과 형식으로 새로이 수용하고 종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물이 깊으면 파도가 고요하고, 배움이 넓으면 말소리가 나직하다〔水深波浪靜 學廣語聲低〕.”라는 구절이 있다. 류창희의 문학도 앞으로 더욱 깊고 나직한 목소리로 인생과 세상에 대한 법고 창신의 혜안이 빛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 허상문 - 문학평론가, 영남대 영문과 교수, 평론집 《프로메테우스의 언어》등 다수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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