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이 메일에는 제발 답장 주지 마세요.'

메일을 읽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듭니다. 어디 한두 번 들은 소리일까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오늘따라 죽비소리가 들립니다. ‘저의 편지에 답장 안 해주셔도 되는데, 자상하신 손 편지를 또 주셔서…’라는 문구가 앞에 있기는 했습니다. 나는 손 편지를 자주 씁니다. 이전에는 푸른빛 잉크병에 펜을 콕콕 찍어 위에서 아래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전각을 하듯 새겨 썼습니다. 펜촉이 사라지면서 볼펜글씨가 마음에 걸려 송화다식 박아 내듯 색종이를 오려붙입니다. 뭐든지 하나 더 얹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사무적인 메일도 석 줄 오면 석 줄만 보내야지 싶다가도 길어집니다. 그나마 다행은 모바일문자는 답하기가 쉽습니다. 글자 수를 제한하니 한통만 보내도 됩니다. 그러나 카카오톡이 문제입니다. 오고 가고 가고 오고, 길어도 상관이 없으니 회의록 작성이 소설문구가 됩니다. 예쁜 이모티콘을 넣어 굿바이 굿나잇 예스 OK 하트모양을 무수히 날려보내도 내가 먼저 끝내지 못하여 술꾼처럼 사연을 풉니다.

 

편지뿐일까요. 까르르까르르 잘 웃는 어린 나에게 할머니께서는 “웃음소리가 길어지면 눈물꽃이 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봄날, 친구 집에 꽃씨를 얻으러 갔다가 서로 바래다주는 것이 꽃피고 잎 지고 눈 위에 발자국이 다 녹아도 단박에 발길을 끊지 못하니, 다시 또 봄이 왔습니다.

그치지 못하는 것이 나의 병입니다. 웃음만 헤픈 것이 아니라 친절도 헤프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고 했던가요. 쉼 없이 사람들과 소통 중입니다. 상대들은 어쩌다 한번 생각하는 것을 나는 그게 전부인 양 붙잡고 매듭의 고를 찾습니다. 뒤엉킨 실타래를 뚝 끊어 가닥을 뽑아 쓰는 지혜가 필요할 때입니다. 남의 사연을 무시하지 못 하니 밤낮 혼자 촘촘하게 뜨개질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리 고달프게 사느냐고요? 아버지가 엄마와 나를 두고 떠났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몸짓하지 않으면 또 누군가 내 곁에서 떠나지 않을까 겁내는 아린 상처의 표출입니다. 소외당함이 두렵습니다. 늘 남의 시선과 평가에 안테나를 세웁니다. 다 사이좋게 잘 지내고 싶습니다. 어떤 이들은 글 쓰는 사람을 이중인격자라고 말합니다. 나는 ‘사중(思中)인격자’입니다. 전생에 취옹(醉翁)선생의 후예였던지 상량상량(商量) 이래 볼까 저래 볼까 생각이 많습니다. 마우스 하나로 로그아웃하면 닫히는 온 오프가 분명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지지!” * 지지(知止), 그칠 때를 알아라.

지지는 본능의 반응입니다. 아기일 때부터 듣고 자란 입말 ‘지지’를 잊고 사는 동안, 내 양심의 규방은 비어 있습니다. 본마음은 외출 중입니다. 어디에 갔을까요. '저런~!' 행랑채에 손님과 노닥이고 있네요. 어느 불청객은 벌써 내 방에서 떡 하니 주인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주 색 재 기(酒色財氣)’입니다. 술손님, 호색손님, 재물손님, 건강손님이 ‘내가 가장 중요하니 나를 알아서 잘 모시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기분이 좋아도 한잔, 나빠도 한잔 홀짝홀짝 술을 자주 마십니다. 아들 같은 배우 천정명을 보고 가슴이 설레기도 합니다. 예전에 목돈 1백만 원만 있으면 베풀고 살겠다고 다짐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나는 당장 생계비로 쓰지 않아도 되는 통장을 양손에 쥐고도 성에 차지 않아 만리장성을 쌓는답니다. 만리장성이 무슨 소용인가요. 건강해야 다 지킬 수 있다며 건강손님에게 깃발을 꽂으려고 합니다. 점점 마른 표고버섯같이 고고해지는 얼굴을 외면하고 나르시시즘에 빠져 아침저녁 소녀의 거울로 나를 비춰본답니다. 결코, 나는 어느 욕망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미혹시키는 주색재기의 호객꾼들을 잘 대접하여 서운하지 않게 보내줘야 합니다. 짧은 문자나 편지 한 통에도 마음의 허세를 다 쏟아붓는 성정이니, 그 무엇을 매몰차게 따 돌릴 수 있을까요. 그러나 다 껴안고 접대하면서 살기에는 나는 힘이 부족합니다. 공연히 기를 써봅니다. 쓸데없는 객기(客氣)입니다.

 

‘명성과 생명, 어느 것이 절실할까. 생명과 재화, 어느 쪽이 소중할까. 소득과 망실, 어느 것이 걱정일까. 그러므로 심히 애착하면 반드시 크게 소모하고, 재화를 많이 간직하면 반드시 엄청나게 손실한다. 욕망을 눌러 스스로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분수를 지켜 자기 능력의 한계에 머물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언제까지나 편안할 수가 있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노자 도덕경 44장-

 

본문에 지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지!” 지지만큼 내게 경을 치는 말이 또 있을까요. 그쳐야 합니다. 개나리 진달래 길섶에 양지꽃과 제비꽃, 꽃의 일은 꽃에 맡길까요. 새 가방 메고 입학하는 학생들, 결혼하는 신랑 신부들, 새로 입사한 산업의 역군들, 시작하는 모든 생명에 희망을 드립니다. 그럼, 나는 뭘 하지? “지지!” 우선 멈추겠습니다.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을 싹둑 자릅니다. 편안하고 싶습니다. 이제 노자의 이름을 빌려 “노자 노자, 글에서 놀아. 안 쓰면 못 노나니♬” 나는 한동안 독자로서 밑줄이나 긋겠어요. 기다리던 봄입니다.

 

* 프로필 : 지난겨울, 바랑 하나 짊어지고 인도 라자스탄 자이살메르 아그라 카주라호 바라나시를 걸었다. 특히,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에서 연명하는 삶과 장작불에 타는 주검이 공존하는 천국과 지옥에서 노닐었다. 연옥에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다. 봄꽃을 또 볼 수 있다.

 

《수필과 비평2013-10》

《논어에세이 빈빈》 2014

<<한국산문>> 2013년 3월호

류창희 

http://rchess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