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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갑순이

갑순이

 

 

 

갑순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나 똑같은 자세로 뒤뜰 수돗가에서 빨래하는 나를 바라본다.

 

? 어서, 들어가. 몸에 바람 든다.”

 

솔바람이 부는 날도, 벚꽃 잎 휘날리는 날도, 백일홍이 핀 날도, 고추잠자리가 바지랑대에 앉은 날도,

한결같이 턱을 괴고 바라본다. 갑순이에게는 내가 롤모델이다.

 

그렇게 빤히 쳐다본다고

 

"네가 내가 되겠니, 내가 네가 되겠니."

 

둘 다 산후풍으로 얼굴이 푸석하다.

너는 목줄에 묶여 있고, 나는 유가적인 인습에 매여 있다.

물설고 낯선 곳, 한데 나와 있기는 너나, 나나 매한가지.

 

어여, 들어가 쉬어라.”

 

한참 후, 빨래를 삶아 들통째 들고나오니,

갑순이가 소나무 밑의 흙을 앞발로 뒷발로 손발이 다 닳도록 파내고 있다.

 

애쓰지 마라, 기운 없다.”

 

뒷마당에 빨래를 널고 들어오는데,

아직 숨이 붙어 꿈틀거리는 제 새끼 한 마리를 물고 나와 제 발로 흙을 덮는다.

'그 무슨 해괴한 짓이냐?'고 호통치지 않았다.

하늘 한 번, 갑순이 한 번. 갑순이 한 번, 하늘 한 번, 바라만 봤다.

사지가 멀쩡한 제 자식도 버리는 세상이다.

개가 개 구실 못할 것 같은 제 새끼를 스스로 거두고 있다.

내가 먹을 미역국을 개밥그릇에 솥째 부어줬다.

 

갑순이가 짓는 소리에 깜박 졸다 일어나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뽀얗게 펄럭이던 빨래들이 지나가는 소낙비에 흠뻑 젖고 있다.

허둥대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나를 갑순이는 내다보지도 않는다.

벌써 36년 전 일이다.

 

이즈음, 나는 비에 젖은 글들을 헹구지도 않고 여기저기 널고 있다.

빨리 빨래나 걷으라고 다급하게 짖어대던 갑순이.

갑순이는 지금 어디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까.

 

 

•  <<에세이문학>> 2020-12

에세이문학 2001년 등단

수필집 : 타타타 메타』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빈빈』 『매실의 초례청선집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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