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실의 초례청

솜꽃이고 싶다


남도 여행길에 남원을 들렸다. 광한루에서 춘향이가 이몽룡을 넘겨다보며 탔다던 그네를 타니 배가 출출했다. 시끌벅적하게 장이 선 ‘월매집’에서 파전과 도토리묵을 안주 삼아 동동주 한 사발을 들이키니 흥이 절로 났다. 그 순간에는 주모의 걸쭉한 육담을 들어도 오히려 분위기에 취해 육자배기 한가락 뽑아낼 것만 같았다.

 

금줄을 쳐 놓은 화단엔 난데없이 목화꽃이 가득하다. 만약 관상용이라면 다른 예쁜 꽃들도 천지인데, 굳이 목화를 심은 까닭이 무엇인가. 딸의 원앙금침에라도 넣어줄 목화솜일까. 퇴기(退妓)의 간절한 모정을 보는 듯 애틋한 마음이 솜꽃처럼 피어올랐다.

 

어릴 때, 장독대 앞에는 빨간 맨드라미가 피어있었다. 어느 날, 커다란 간장 독 뒤에서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목을 길게 빼고, 소꿉놀이를 훔쳐보는 또 다른 선홍색 꽃을 보았다. 어른들은 장독이 깨진다며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었는데, 매혹적인 꽃빛깔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약으로 쓰인다는 양귀비는 아무리 화사하고 고와도 목화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차지가 아니었다. 

 

내 고향에서는 왜 드러내놓고 목화농사를 짓지 않았을까. 어머니가 아기를 가지면 할머니께서는 먼 밭 후미진 끝자락에 목화를 한 이랑 심으셨다. 손은 귀하고 병치레가 많아 명이 짧았던 시절이었으니, 혹 삼신할머니의 노여움이 두려웠을까. 아마도 소리 소문 없이 아기이불에 넣을 목화솜을 재배하는 지혜였으리라.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몰래 목화밭 찾기를 즐겼다. 무궁화과에 속하는 목화는 아욱하고도 닮았다. 줄기와 잎자루의 겨드랑이에서 작은 꽃대가 나와 한 송이씩 핀다. 아침에는 연 노랗게 피었다가 오후에는 자주색으로 변해 시들어 버리는 하루살이 꽃이다. 꽃을 보면 입안에 침이 먼저 고였다. 잔뜩 물을 머금은 솜꽃다래를 입안에서 툭 터뜨려 씹으면 달착지근한 맛이 향기로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함께 따먹을 동지가 중요하다. 혹 먼발치에 인기척이라도 있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기에 더 조마조마했다.

 

나는 도시보다는 시골이, 세련됨보다는 촌스러움이 편하다. 어느 책에 ‘당신의 컬러 감각 지수는?’ 이라는 설문에 들어가 봤다. ‘분위기 있는 가을사람’ 이라고 나왔다. 가을 색은 모든 색에 노랑과 갈색이 섞여 따뜻한 느낌을 주는 농촌 분위기의 색상이다. 가을들녘처럼 광택이 나지 않고 질감을 느낄 수 있는 옷이 분위기를 높여주며, 액세서리도 나무나 가죽의 자연재료가 어울리고, 가을사람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상대방에게 친근감을 준다고 했다.

 

자연스러움이 나와 어울린다는 내용이 마음을 끌리게 했다. 올 추석빔으로 실크 소재의 핑크 빛 원피스를 욕심내고 있었다. 의상실 앞에서 잠시 멈추기를 거듭하다가, 결국은 볏짚으로 물들인 지푸라기 색 무명적삼을 고른 것은 내심 취향과 맞추고 싶어서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곁에서 늘 지켜보는 손아래동서가 아파트 한 통로에 살고 있다. 동서사이는 동쪽과 서쪽의 울타리 거리만큼 저울질하기 마련이다. 얼마간의 질투심이 배어있어 늘 조심스럽다. 동서는 가끔 우편함이나 e메일 등으로 글을 보내온다. 그 날도 우표 없는 편지에 '감성이라고 하나요. 정서라고 하나요. 아무튼 그런 것이 저는 거친 삼베 같은데, 형님은 결 고운 비단 같으십니다. 생활의 순간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가, 그 비단 위에 솜씨 좋게 수놓을 수 있는 것이 부럽습니다.' 라고 씌어있었다.

 

동서의 칭찬도 어색했지만 ‘비단’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비단은 장롱서랍 깊숙이 한지에 싸 간직할 뿐, 내 몸에 맞게 마름질하여 쓸 물건은 아닌 듯했다. 손위동서랍시고 그동안 비단흉내를 내고 있었나보다.

 

딸을 생각하는 월매의 마음처럼, 태어날 손주를 생각하는 할머니의 마음처럼,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마음 밭에 목화를 심자. 우아한 꽃의 자태, 달콤한 물을 머금은 솜꽃다래. 

나는 가을 날 피어나는 ‘솜꽃’이고 싶다.

 

 

 


<<매실의 초례청 >> 2008

 

류창희 

http://rchessay.com

'매실의 초례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알머리  (0) 2017.02.19
쫑(終) 파티에서는 종(鐘)소리가 울렸다  (0) 2017.02.19
댓돌 위의 흰 고무신  (0) 2017.02.19
여행을 떠나다  (0) 2017.02.19
장마전선  (0) 2017.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