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잘 입어야하는 이유
거미처럼 눈만 퀭하던 내가 시립도서관 여러 곳에서 유학儒學강의를 하게 되었다. 지금도 시집 대소가 가족은 내가 무엇을 하러다니는지 잘 모른다. 하기야 집안 대소사에 거의 참석을 하니, 일하는 여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 당시, 집의 어머님도 당연히 모르셨다.
그중 B도서관은 번화가에 있다. 사통팔달 버스 지하철 택시 정류장과, 은행 시장 백화점 식당 등이 밀집된 곳이다. 그날, 칠판에 판서를 하다가 무심히 뒤돌아섰다.
‘어! 여기, 어디?’ ‘나, 누구?’
순간, 얼른 다시 뒤돌아섰다. ‘여기는 B도서관 강의실’ ‘나는 선생’ 자세를 바로 하여 아주 천천히 수강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집에서는 조심스럽고, 문 밖에서는 가장 존경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지금 우리 강의실에 와 계십니다.” 라고 소개했다. 호명되신 어머님은 일어나 상냥하되 위엄 있는 목소리로 “부족한 저희 며느리……” 아~, 그 순간의 당황스러움이란! 나는 진땀을 흘렸고, 몇 분 어르신은 사돈집 상견례 하듯 함께 서서 맞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도서관 정문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집으로 한 번에 갈수 있는 버스도 그곳에 선다. 나는 늘 그곳에서 버스를 탔다. 어머님은 내 손을 세차게 낚아채더니 철물골목으로 잡아끄신다. “왜요, 어머님?” “니, 사람들 앞에서 저 버스 탈끼가?” 괜한 역정이시다. “그리고, 옷이 그기 뭐꼬?” 나는 그때까지, 정말 한 순간도 사람들 앞에서 버스를 타는 것이나 입은 옷이 부끄럽다고 여긴 적이 없다. 어찌하면 더 중후해보일까 하고 일부러 개량한복을 즐겨 입고 다녔다. 오히려 무명의 소박함이 <논어>과목과 어울린다고 자부심까지 가졌다. 어머님 눈에는 며느리가 냉면집에서 보조 일을 하는 조선족 여인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어머님, 전 괜찮아요.” “잔소리 말고 쫓아와라” 대로로 나가 지하차도를 통과하더니 L백화점으로 앞장서신다. "옷 한 벌, 사자” 그날 옷을 산 기억이 없으니, 또 내가 완강하게 거절했었나보다. 그 후, 나의 차림은 몇 년 철 지난 명품(?)을 입고 다녔다. 어머님도 형님도 나중에는 새로 시집온 손아래 동서도 사이즈가 작은 옷을 내게 줬다. 말하자면 의상협찬이다. 이름 있는 옷을 걸쳐도 옷태가 나지 않던 그야말로 ‘무명’시절이다. 어쩌다 반지하나를 끼면 이웃 아낙들이 ‘진짜’냐고 묻는다. 그럼 내가 가짜를 끼겠는가. 옷도 보석도 제값을 못하고 겉돌았다.
그 후, 어머님은 오랜 기간 병원생활을 하셨다. 출근도장 찍듯 매일 병원에 들어서면 내 입성부터 살핀다. “와, 스커트가 없나?” 철이 바뀌었는데도 얇은 옷을 입고가면 내 ‘버버리’코트 갖다 입어라. 가끔 아버님하고 병실에 같이 들어서면, “여자는 3센티 이상의 구두 굽에 치마를 입어야한다.”며 센스 없는 며느리를 챙기셨다.
어머님은 멋쟁이셨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하루에 몇 번이라도 옷을 기능대로 바꿔 입으셨다. 때와 장소를 24절기 나누듯, 아버님 출근하기 전 일복과 앞치마, 출근 때 대문까지 배웅하는 옷, 낮에 외출하는 옷이 다 달랐다. 합창단, 꽃꽂이, 서예, 식사모임, 결혼예식장, 문병, 문상을 엄격히 구분하셨다. 양장과 한복뿐 아니라 투피스, 원피스, 카디건에 따라 핸드백, 손수건, 레이스무릎덮개까지 갖추셨는데, 그중 옆으로 슬쩍 기울게 쓰는 모자가 여왕처럼 멋스러웠다.
그때는 옷을 양장점에서 맞춰 입던 시절이다. 어머님은 단정한 걸 좋아하셨다. 목깃과 치마 주름이 각이 서도록 꼭 빳빳한 남자 양복지로 맞췄다. 시폰이나 실크 옷으로 어깨나 무릎이 드러나는 사람을 보면 혀를 찼다. 저녁시간 드레스 길이는 발목에서 멈추고, 정갈하게 풀을 먹이는 잠옷도 철마다 간절기까지 가운을 준비하셨다. 경쾌한 피크닉 복장도 짧아봐야 샤넬라인 위로 올라가는 적이 없었으며, 아웃도어가 아니면 원색을 피하여 파스텔톤으로 어느 옷과 매치해도 잘 어우러졌다. 외출할 옷차림을 다 갖추면, 일을 많이 한 손가락 마디가 민망하다시며 그물장갑으로 마무리하셨다.
“휴우~,”
옷 이야기가 장황했다. 별별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분을, 아침저녁으로 수발할 수 있었던 나는 복이 많다. 그러나 아직 감히 어머님의 모습을 닮지 못한다. 당시, 고무신과 구두를 닦아드리며 ‘왜, 저러실까?’ 밖의 일을 하시는 분도 아닌데…, 참으로 유난스럽다며 속된 소견머리로 남몰래 팔자타령도 하던 터였다. 그런데 요즘 그분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철저하게 관리하던 정성이 몹시 그립다. 부덕婦德의 완성이 옷일 뿐, 어머님은 마음씨 말씨 맵시 솜씨에 억척스런 삶까지 내게는 최고의 이상향, 여성군자君子셨다. 그 아름다움은 사치하고는 다르다. 그래, 여자라면 어머님 정도는 되어야한다. 지금도 구순의 아버님은 어머님을 회상하시면서 “나에게 여자는 네 어머니밖에 없다.”고 단정하실 만큼, 아내 자격이 완벽한 분이셨다.
나는 어머님처럼 각을 잰 듯, 법도를 지키듯, 일상을 마름하고 다듬을 여력이 없다. 더구나 미적美的 감각도 모자란다. 어느 날은 감당도 못할 가랑이가 터진 긴 스커트와 펄렁거리는 얇은 원피스, 그리고 열 발가락이 다 보이는 샌들을 스타킹 없이 마구 신는다.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바로잡다가 얼핏, 내 어머님과 눈이 마주친다. 어머님의 눈으로 나를 비춰본다. 이건 너무 성의 없는데…, 이건 너무 무례한데…, 품격의 잣대를 생전의 어머님 이미지에서 찾는다.
십 수 년이 지나 다시 찾아오는 수강자들이 계시다. 그분들은 내가 어딘지 낯설다고 한다. ‘가장 명품 옷은 자신감을 입는 것이다’ 나는 요즘 이렇게 잘난 척을 한다. 겸손하지 못하니 전에 내 어머님처럼 우아하지 못하다. 풀 섶에 낮춰 피던 각시붓꽃 같은 수줍음은 사라지고, 지난 봄, 삽시간에 피었던 벚꽃마냥 환하게 소리 내어 곧잘 웃는다. 그분들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속삭인다. “저도 어느덧, 시어머니가 되었거든요.” 마주보고 “하하 호호” 웃음소리에 벚나무 붉은 잎이 휘날린다.
어찌 할거나, 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도 “낙엽 따라♬~” 가고 있다.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류창희 / 선우미디어
<<현대수필>> 2017 겨울
《논어에세이 빈빈》《매실의 초례청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