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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아씨의 프로방스

가파른 사랑

 

가파른 사랑

- 아일랜드 모허 절벽

 

 

 

개선문이 보이는 순간, 탄성을 질렀다. 엽서에서만 보던 그림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세상에 파리의 개선문처럼 멋대가리 없는 풍경이 있을까. 프랑스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개선문에 대가리라고 붙이는 망발은 심하다. 그만큼 처음 보는 감동이 컸다.

 

아일랜드에서 웬 파리냐고? 어느 날 문득, ‘저기 가고 싶다고 주사의 던지듯 한마디 한다. 남편은 혼자 몇 달 전부터 바쁘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럴 때, 이 남자는 약발이 극에 달한다. 참다, 참다 도서관에서 한꺼번에 여행 책을 한 아름 빌려와 공부 좀 하라고 다그친다.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도 그랬다. 그리스로마신화 1.2권 로마의 역사 등등 몇 권을 읽었다. 나중에는 신들의 이름이 복잡하여 머리가 쇠 수세미처럼 얽혔다. 그냥 류창희’ ‘ㅇㅇ이라고 하면 될 것을. ‘자만 해도 아가멤논 아낙사레테 아누비스 아도니스 아레스 아르고스 아르테마스 아리스토파네스 아리아드네 아마존 아비도스 아이게우스 아이기스토스 아이수퀼로스 아이아스 아이올로스 아이트라 아이티오페이아 아울리스 아크로코린토스 아킬레우스 아테나 아테나이 아티카 아폴론 아프로디테 아피스, , , , 아연실색 숨이 넘어갈 판이다.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가 나에게는 자물쇠다. 막상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내가 기억하는 장소와 신의 이름이 다 헷갈렸다. 여행 내내 나는 역시 머리가 안 된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책을 많이 읽고 갔던 이탈리아 여행이 여행 중 가장 실패했던 기억이다.

 

나는 도시의 이름과 거리위치를 나열해 지리 교과서를 편찬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변하는 그 나라의 환율이나 버스노선이 들어있는 안내 책자를 낼 정보지를 낼 것도 아니다. 손가락 두드려 나오는 정보는 인터넷 안에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행선지에 대해 미리 공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나의 억지가 못마땅하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내 느낌이 소중하다.

 

모허 절벽이 그랬다. 그냥 맞닥뜨려 보는 거다. 선입견만큼 감성의 말살은 없다. 지식이 얕을지라도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만큼만 느낄 것이다. 첫 느낌을 학습 당하는 것은 테러다. 어디든 갔다 와야 뒤늦게 관심 갖고 그곳을 보기 시작한다. 사람도 그렇다. 짝지와 7년간 연애하면서 점점 매력에 빠져들었다. 가고 싶은 나라도 첫 느낌에 맡기고 싶다. 어디든 누구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다. 먹고 잘 곳은 다 있다. 그곳에서 그들의 문화를 눈치껏 어렵사리 더듬더듬 경험해보는 거다. 우리의 인생이 연습이 없듯, 발길 닿는 대로의 여행이 맞고 틀리고의 정답이 없다. 가슴 뭉클했던 풍경과 사람들을 떠올리며 다녀온 곳을 추억한다.

 

내가 만약 영화 라이언의 딸을 먼저 보고 갔더라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의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물론 그래서 놓치는 부분도 많다. “, 저기 가면 저것 봐야 하는구나!” 남편은 못내 한숨을 토로한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아쉬움이 있어야 다음 기회를 또 마음에 품는다. 여행 후기를 쓰면서 아는 척, 잘난 척, 있는 척, 삼척동자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난여름 매우 아팠다. 겸손한 척, 우아한 척 척척이 그 순간에는 부질없었다. 당분간은 내 감정에 충실하고 싶다.

 

영화 라이언의 딸첫 장면은 절벽 위에서 떨어뜨린 양산을 절벽 아래에서 낚시하던 신부와 바보가 줍는다. ‘1916,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을 벌이는 격동의 아일랜드 시절, 자유분방한 처녀 로지는 소심한 초등학교 교장 찰스와 결혼한다. 그러나 신혼 첫날밤, 찰스와의 관계에서 크게 실망한 로지는 곧 결혼생활에 지루함을 느낀다. 그리고 근처 영국군 캠프의 부상당한 영국군 장교 랜돌프 도리안에게 매혹되어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모든 걸 알고도 말없이 눈감아 주는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한때의 로맨스라고 이해하며 영화평론은 아름답게 미화한다.

 

세상의 어느 남자가 아내의 불륜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그대에게 모두 드리겠다고 맹세했던 나의 남편도 어림없는 소리다. 비록 영화로는 실패했다지만, 거친 파도와 매서운 바람은 컴퓨터가 그려낸 그래픽이 아니다. 크롬웰이 아일랜드를 처음 정복하였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 살고 싶은 자는 섀넌 강을 건너라고 했을 정도로 자연환경이 사나운 곳이다. 실제 경치와 실제 비바람 속에서 찍었다고 한다. 세계 사람들이 모허절벽을 찾는 이유다.

 

나는 모허 절벽의 경관보다 아내의 불륜까지 감싸 안아주는 영화 속의 남편이 더 절경이다. 그렇다고 뒤늦게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양산 같은 사랑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다 받아줄 것 같은 남편이 이제는 혈족血族 같은 느낌이다. 같이 산 세월이 검은머리 파뿌리 된 우리를 아일랜드 모허 절벽 앞에 데려다 놓았다. 새삼 무엇이 겁날까. 길 위에서 함께 죽어도 아쉬울 것도 아까울 것도 없다.

 

나는 늘 감성을 꿈꾼다. 집의 아이들이 분리 독립하자마자, 남편은 숙제를 마친 듯 직장을 그만뒀다. 그는 여태까지 월급을 벌었다. 이제 그는 시간을 벌 차례다. 월급이란 것은 딱 한 달 생활비로 쓸 만큼만 주어지기 때문에 모아지지 않는다. 시간도 그렇다. 뭐든 있을 때 써야 한다. 나 혼자 날마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어디론가 함께 떠날 자금을 마련한다. 일할 수 있는 한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요즘 우리 부부가 함께 읽고 있는 책은 다 쓰고 죽어라. 인생이란 오로지 하나의 가파른 절벽을 기어오르다가 정년이 되면 벼랑 끝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다.”는 문구가 마음에 꽂혔다.

 

모허절벽에서 중년의 프랑스 부부를 만났다. 이산가족 상봉하듯 서로 얼싸 안았다. 며칠 전에 테이호 호수앞에서 만났던 반가움이다. 피부 빛깔은 달라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부의 사는 모습은 비슷한 것 같다. 동지애를 느낀다. 절벽을 배경삼아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들도 가파른 사랑은 영화로 대리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오늘도 밋밋한 일상으로 돌아와 한 침대에서 잠들 것이다.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류창희 / 선우미디어


《여행작가》 2016 – 3 • 4 이야기가 있는 풍경 연재 (6)



류창희 

http://rchess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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