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끼
여행프로그램이다. 얼마 전, 소설가 김ㅇ이 ‘風輪풍륜’이라고 쓴 깃발을 꽂고 자전거로 프랑스 파리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자전거는 혼자 타는 것이다. 그의 옆에 자전거를 타고 뒤따르는 여성이 있다. 그 여성은 도발적으로 보인다. 만화영화 속의 악독한 캐릭터처럼 가죽 재킷에 굽실한 긴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휘날렸다. 눈 주위를 검게 칠한 스모키화장, 반 장갑 사이로 보이는 긴 손톱, 자전거 손잡이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에서 색정이 엿보이는 사진작가다.
두 사람의 시선, 몸짓, 대화에 끌려든다. 물론 일부러 감독에 의해 연출되었으리라 짐작하면서도 ‘철컥’ 내 마음에 철벽을 쳤다. 방송은 바로 그 긴장감을 노렸을 것이다. 그 정도의 나이, 그 정도의 교양, 그 정도의 체력, 그 정도의 언어소통, 그 정도의 경제력이 보편적이진 않다. 그러나 수신료를 내는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의 로맨스는 꿈꿀 수 있잖은가. 방송은 지금 시청률을 겨냥하는 중이다.
그 후, 다시 소설가 박ㅇㅇ의 터키문명 기행을 TV로 보고 있었다. 남편이 옆에서 등장인물에 관심을 보인다. 물론 그의 옆에도 동행하는 또 다른 여성이 있다. 커다란 카메라를 손에 들고 사막으로 초원으로 혹은 인파 속에서 속살거리는 모습이 실루엣처럼 따라다닌다. 그런데 예상을 깼다. 이 여성은 시청자들이 방심하기에 딱 알맞다. 화장기가 전혀 없이 해맑은 얼굴이다. 여학생 같은 단발머리에 흰색 면 티셔츠, 짧은 대님팬츠가 신선하다. 나의 남편이 무심결에 툭 던지는 한마디 “쟤는 박범신 딸이지?” “무슨?” 말투 걸음걸이 손짓 등이 모두 자연스럽다며 장면 장면을 줄줄 꿰어 설명한다.
나는 의아해하며 “아니, 컨셉일거야.”라고 했다. 다 끝나고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름들이 자막으로 올라가는데, 나레이션 ‘박ㅇㅇ’ 포토그래퍼 ‘박ㅇㅇ’이라고 나온다. 나의 남편은 ‘거봐!’ 하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졌다. 내가 또 진도를 너무 빨리 뺐구나. 순수에 덧칠한 것 같아 오히려 무안했다. 나는 바로 인터넷검색을 했다. 박ㅇㅇ, 박ㅇㅇ을 치니, 테마기행이 줄줄이 뜬다. 그중 “박ㅇㅇ 박ㅇㅇ 부녀지간 맞나요?”라는 물음에 “아닙니다.” 라는 답변이 보인다.
누군들 아담과 이브처럼 태초의 역사를 쓰고 싶지 않겠는가. 딸과 같은 소녀와 원초적인 풍경이 되고 싶은 건, 아마 조물주도 꿈꾸는 로망일 것이다. 그곳 낙원에서는 나뭇잎 한 장이나 사과 한 개도 거추장스러울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와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어미 같은 여자와 아들 같은 소년은 어떠할까. “뭣이라!” 뭐 그리 발끈할 것까지야. 어디까지나 상황설정을 해보자는 말이다.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그리스로마신화로 떠나보자. 어떤 나라에 공주가 셋 있었다. 막내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사람들은 아프로디테(미와 사랑의 여신)에게 제사지내는 것도 잊고 막내인 프시케에게만 홀려 있었다. 화가 난 여신은 아들 에로스에게 부탁했다. 프시케에게 사랑의 화살을 한 대 쏘아 사랑에 빠지게 하되, 아주 추악한 인간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했다. 에로스는 어머니가 당부한 대로 프시케에게 쏠 사랑의 화살을 준비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가혹하다. 에로스는 그만 자신의 화살촉에 찔리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에로스는 프시케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금기는 깨라고 있는 것일까. 먹지 말라는 선악과는 몰래 따먹어야 제맛이 난다. 궁금증을 이길 수 없었던 프시케는 어느 날 밤중에 등불을 켜고 신랑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신랑은 괴물이 아니라 금빛 고수머리가 양털같이 보드랍고 이목구비는 눈처럼 흰 미소년이었다.
남성들만 그런가. 여성들도 에로스를 꿈꾼다. 어느 날, 우리나라 알만한 중견 여배우가 17세 연하와의 스캔들로 떠들썩했다. 남성들의 눈빛은 “저래도 되는 거야” 비난의 화살을 쏘고,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기자들이 앞 다투어 마이크를 들이밀며 심경을 물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여배우가 이 나이에 그런 스캔들로 인터넷 검색 1위라면, 여배우로서 괜찮은 것 아니냐?”며 나머지는 법정에서 밝히겠다고 했다. 그녀의 당당함에 나는 ‘야~ 멋있다.’ 생각하며 큐피드의 화살을 파바박 팍! 발사했다. 당시 그녀에게는 법적인 남편도 없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돌을 던진다. 누가 하면 로맨스고 누가 하면 불륜, ‘내로남불’이다. 남편도 지금 순수한 소녀와의 낭만을 꿈꾸다가 나에게 ‘딱! 걸렸다.’ 그렇다면 방법은 있다. 내가 신화 속의 소녀가 되자.
그동안 나는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다. ‘비와 바람과 태양이 빚어낸 것’은 터키의 유적지만이 아니다. 신화는 신화일 뿐, 신전의 돌멩이는 돌멩이일 뿐이다. 내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더구나 다시 여자를 꿈꾸다니 부질없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인 실전이다. 어느 노장 여배우는 TV에 나와 15분이 아까운 여생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직 하루가 아까운 나이다. 이 소중한 일상을 날마다 습관적인 부부로 살 수는 없다. 이쯤에서 하루하루 로맨틱하게 동행하고 싶다. 나는 남편에게 어떤 미끼를 던질까.
……
“어이, 흰머리 소녀! 정신 차리시게.” 로맨스를 꿈꾸는 흰머리 소년의 어깨에 불똥이나 떨어뜨리지 말지어다.
‘미끼’라는 제목을 ‘객기’로 풀고 있다.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류창희 / 선우미디어
수필세계 2015-7.8
rch56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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