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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내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


나는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졸졸졸 시냇물에는 송사리들이 산다. 손으로 떠내면 송사리는 내 손안에도 있다. 운 좋은 날은 붕어도 한 마리 잡힌다. 깜장고무신 안에 전래동화도 있고 이솝우화도 있다.

 

비 온 뒤의 봇도랑 물은 빠르다. 어제처럼 한 발로 뛰고싶지만 물살이 겁난다.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가 다가선다. 요리조리 궁리하며 해내는 숙제와 같다. 도랑물은 교과서다.

 

천둥번개 치며 소나기 퍼붓더니 말짱하게 해가 난다. 호랑이 장가가고 여우가 시집을 가는지, 개울의 징검다리도 물 속에 잠겨버렸다. 책보를 머리위로 묶고 손에 손을 잡는다. 물살이 센 쪽은 깊고 약한 쪽은 얕다. 과수원 길을 향해 사선으로 길게 선다. 다리에 힘을 주어보지만 그래도 조금씩 떠내려간다. 조잘대는 이야기, 함께 부르는 노래와 같은 개울물 소리는 독서토론을 하는 우리들의 목소리다.

 

댐에 갇혀있는 물은 에네지가 된다. 내신성적처럼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입시 때에 쓴다. 빗물은 제도권교육처럼 가뭄이 들기도 하고 홍수가 날 때도 있다. 잘 조절하려면 시험을 잘 치는 요령도 중요하다. 모범생도 답을 밀려 쓸 때가 있다. 평소보다 점수가 높으면 운이 좋았다고 한다. 운도 실력이다. 

 

수학여행에서 처음 본 폭포는 높았다. 물은 낮은 곳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위에서 떨어지는 것이 신기했다. 산을 다 덮을 듯이 물줄기만 보인다. 물보라 속에 무지개가 뜬다. 경서(經書)속에 있는 성인들의 말씀처럼, 세찬 물줄기에서 서광이 비치는 순간이다. 처음으로 무엇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물방개가 산다고 다 건강한 물이 아니듯, 책이라고 해서 다 좋은 책은 아니다. 진실을 보는 눈을 감고 취한 듯이 비틀거리면 물은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수선화 빛깔이 곱다고 나르시시즘에 한없이 빠져서는 안 된다. 뚬벙뚬벙 물 썩는 소리가 나는 방죽에는 물귀신이 기다리고 있다. 따끈한 밥이 몸을 살찌우듯 양서(良書)는 정신을 건강하게 한다.

 

얼음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소리는 차갑고 맑다. 냉철하면서도 운치가 있는 선비들의 모습이다. 퇴계, 율곡, 김삿갓을 내 어찌 만날 수 있으랴. 시공을 초월해 그분들과 만나 시 한 수 읊고 담소까지 즐기는 여유다. 고전(古典)을 읽으면서 나는 봄 풀의 꿈속에 노닐어 본다.

호수처럼 편안한 강물은 한 폭의 수채화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물 속에 마음까지 잠긴다. 잔잔한 물위에 조약돌을 던졌다. 조약돌의 파문은 한 송이로 끝나기도 하지만, 잘만 던지면 몇 송이라도 피워낼 수 있다. 퐁퐁퐁 퐁당 나의 평범한 일상에서 강물처럼 투명한 수필(隨筆)한편 쓰고싶다.

 

책 읽는 모습에서는 언제나 낭랑한 물소리가 난다. 내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다. 

가을의 풍작을 꿈꾼다.

 

 


2002년 부전도서관 소식지 


류 창희 

http://rchess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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