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춘孟春
촛불로 물길을 잡을 수 있을까.
세상은 온통 출렁이고 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겠다.’초나라 굴원이 「어부사」에서 읊는 선비정신이다.
안색은 초췌하고 몸은 마른 나무처럼 수척한 선비가 물가에 노닐면서 세상을 노래하고 있다. 어쩌다 그 꼴이 되었는가. 세상이 온통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흐려 있는데, 혼자 맑았기에 그리되었다. 참으로 딱한 양반이다.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그들을 따라 함께 출렁이지 못하고, 어찌 몸이 그 지경이 되었는가. 그는 차라리 물고기의 뱃속에서 장사를 지낼지언정, 세속의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쓸 수가 없다고 하며 떠났다. 다시는 그곳 상강에서 그를 볼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돌 지난 바하가 아장아장 곧잘 걷는다. 아침이면 아파트에 노란 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나간다. 배꼽 인사와 줄서기의 기본을 배우는 어린이집 행렬이다. 아이들을 버스에 태워주러 엄마 혹은 아빠가 유모차에 동생까지 태우고 나온다. 그들 틈에 아기 돌보미 아주머니들도 있다. 나도 나가 기다린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이가 내 손을 잡고 기둥 뒤로 잡아끈다. 기둥 뒤에는 야쿠르트 판매원 아주머니가 있다. 친한 엄마끼리는 아이들에게 서로 사주기도 한다.
바하도 얼른 가서 줄을 선다. 어느 날은 야쿠르트를 파는 아주머니 앞에, 어느 날은 사주는 엄마 곁에, 혹은 친구 곁에 끼어 선다. “안 돼.” 우린 돈을 내지 않았다고 엄하게 말하니, 그예 “앙~” 울음을 터뜨린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그 줄은 공짜와 특혜를 주는 줄이다. 말 못하는 아기도 줄을 잘 서야 야쿠르트를 얻어먹을 수 있다는 것을 눈치로 안다.
춘추전국시대 위나라 대부 왕손가가 “성주대감에게 아첨하기보다는 차라리 부엌의 조왕신에게 아첨하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께서 “그렇지 아니하다. 하늘에서 죄를 얻으면 더는 빌 곳이 없다.” 공자께서는 천벌을 받는다고 일침을 가한다. ‘출세하려면 모름지기 줄을 잘 서야 한다.’는 왕손가의 말이다. 하기야 배고팠던 시절, 우리도 백부나 숙부보다 밥을 푸는 고모나 숙모를 찾아가야 국물이라도 얻어먹었다. 만약 흥부가 놀부를 찾아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필시 물볼기 세례나 흠씬 받았을 터, 그나마 형수를 찾아갔으니 주걱으로 뺨을 맞아도 뜯어먹을 밥풀떼기라도 있었잖은가.
당시, 왕손가는 비선秘線의 실세다. 정의실현을 한답시고 부질없이 지방마다 떠돌아다니는 주유열국을 그만하고, 자신에게 잘 보이라고 공자를 유인하는 장면이다. 정의는 바른 분배다. 그는 각종 이권과 밥그릇의 인사권을 쥐고 있다. 이에 공자께서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며 거절한다. 예로부터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 했거늘, 북신北辰이 제 역할을 못 하니 민중이 은하수銀河水되어 광장에서 촛불을 켠다.
비선은 거지 근성이다. 거지는 부자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조금 더 동냥 받은 거지를 부러워한다고 한다. 상대를 부러워하는 가운데 거지 근성이 자꾸 자란다. 조금 많이 동냥 받은 거지는 점점 그 물에서 오만해진다. 검찰청 현관 앞에 벗겨진 프라다 신발 한 짝이 화면에 클로즈업되었다. 희대의 큰 동냥아치다운 ‘거지발싸개’다. 이 문전 저 문전 마구 짓밟던 도적盜賊의 신발이다.
어느 사람이 옥황상제에게 소원을 말하러 갔다. 저는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 알았다. 나가보아라. 두 번째 사람이 소원을 말했다. 저는 부는 필요 없습니다. 귀한 명예를 얻고 싶습니다. 그래 접수되었다. 세 번째 사람이 들어갔다. 저는 앞의 두 사람과는 다릅니다. 부도 명예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과 알콩달콩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예끼! 이 사람아. 그렇게 좋은 것을 할 수 있다면, 내가 여기서 옥황상제 노릇을 하고 있겠느냐?”며 된통 호통만 듣고 쫓겨나왔다고 한다. 참으로 평범하게 살기가 어렵다.
너무도 고결하여 물에 뛰어드는 선비도,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올라가 구차하게 밥줄을 붙잡는 비선 특혜도 바라지 않는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의 건축처럼 살고 싶다. 날마다 벽돌 쌓듯 하루, 한 달, 일 년…, 반평생을 부지런히 살다 보니, 나는 어느새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마주 앉아 차를 마실 커피잔도 녹차 잔도 다 있다. 물질뿐인가. 인맥도 든든하다. 누구의 아내요, 어미요, 할머니이기도 하다.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도 부와 명예를 다 갖춘 사람들이 그토록 부러워한다는 글까지 쓰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고마운 소유인가.
그런데 슬며시 겁이 난다. 과연 나는 분수에 맞게 살고 있었을까. 글을 쓴다는 우쭐함으로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혹은 태블릿 PC와 스마트 폰을 들고 다니며, 메일 문자 카카오톡이나 손편지로 그동안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었는지. 자신의 처지에 맞게 사는 것이 검소라면, 쥐뿔도 없으면서 겉만 과하게 행하는 것은 사치라고 한다. 여태까지 검소와 사치 사이에서 인색했을지도 모른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임과 함께 더불어 살고 싶다. 겨울이 춥다. 한동안 군불을 더 때야 할 것 같다. 선비 비선, 좌파 우파, 주류 비주류, 부귀 빈천, 오픈 클로즈, 북극성과 뭇별들이 한마음으로 “위하야〔野〕! 위하여〔與〕!” 함께 건배하는 화합을 기대한다. 지금 나는 봄에 뿌릴 씨앗을 고르고 있다. 워킹 맘을 돕는 황혼 육아의 일이다. 갓끈을 씻어 벼슬을 할 만한 일은 결코 아니지만, 물이 맑다. 머지않아 희망의 새싹이 움틀 것이다.
바야흐로, 맹춘孟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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