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산요수樂山樂水
요산요수, 이것이 문제로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니,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즐기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 - 공자.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질다. 선산 아래 정자를 지어놓고 삼강오륜의 질서를 지키며 숭덕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조상 잘 받들고 나이와 항렬을 따지며 문중과 종친을 귀히 여긴다. 문향정聞香亭에서 고요하게 꽃들의 향기나 즐기는 정적인 분위기다. 남산골샌님이거나 ‘독락당’을 짓는 회재선생이다. 달그림자와 곡차를 벗하는 풍류객이며, 전원을 꿈꾸는 자연인이다.
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혜롭다. 물결 따라 움직인다. 물 찬 제비 닮은 자동차, 백조처럼 우아한 요트로 방방곡곡 혹은 지구의 반 바퀴 유랑을 꿈꾼다. 나이나 직책으로 편 가르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수평적인 사고로 늘 새로움을 추구한다. 인자처럼 한 우물을 파느라 평생 수고롭지 아니하다. 낚시, 여행, 춤, 그림, 사진, 재테크… 즐겁고 재미있는 동호인들과 함께한다.
그들의 일상생활을 살펴볼까. 어진 사람들은 다 내 마음 같겠거니 여긴다. 식사하고 술을 마시며 자신의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전부 부담한다. 가끔 식당 계산대 앞에서 서로 밀치고 막아서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한국인의 정서를 모르는 외국인이 보면 ‘저들은 밥 잘 먹고 계산대 앞에서, 왜 저렇게들 다툴까?’ 이상하다. ‘그대께서 잡수신 음식값을 내가 내겠’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싸움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남과 나를 엄격하게 구분 짓는다. 이익과 손해가 분명하다. 혹시 일본인 관광객을 보았는가. 식당 앞에서 각자 동전까지 세어가며 계산한다. 저런 야박한 처사라니,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점점 부럽다. 내 밥값 내가 내면 ‘다음’이라는 부담이 없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안 만나면 그만이다.
어진 사람들은 지갑 안에 돈이 없어도 밥 먹는 자리에 참석한다. 지난번에 내가 밥값을 냈으니 오늘은 당연히 상대방이 내겠거니 믿음이 강하다. 성직자가 될 소질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각자 회비 내고, 토론이 자유롭다. 어진 사람들처럼 인도주의를 발휘하여 밥값 낸 사람의 이야기를 참아가며 일방적으로 경청하지 않는다.
예전에 어르신들은 인자에 가까웠다. 내 인생에 나는 없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며 내 자식을 무조건 감성으로 껴안는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참아가며 허리띠 졸라매어 모은 재산을 자식에게 다 준다. 그렇게 하면 노후에 마땅히 봉양 받을 거라는 의존적인 확신이다. 노동을 천시하고 선비정신을 존중한다. 만물을 품고 하늘을 따라 장수한다.
지자들은 어떤가. 자녀에게 고기 잡는 법만 전수한다. 성인이 되면 가차 없이 독립시킨다. 재산증여는 어림도 없다. 자신의 노후는 자신이 책임진다. 내 손이 내 딸이라며 부모와 자식 간에 범벅도 금을 그어 먹는다. 땀 흘린 만큼 얻은 가치를 높게 여긴다. 냉철하고 이성적이다. 쓰고 남는 돈이 있어도 사회에 환원한다. 무조건 신神을 공경하지 않으니, 서양에 가서는 교회에 나가고, 고국에 돌아오면 조상 모시고, 절에 가면 절한다. 사회적인 종교다. 아버지는 가난해도 자식은 부자이기도 하고, 부모는 부자라도 자식이 가난하게 살기도 한다. 인자들처럼 아들 손자, 며느리 삼 대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다. 자녀들도 나처럼 열심히 살면 된다. ‘지금, 여기’가 ‘황금’보다 소중하다. 더불어 삶을 즐긴다. 즐겁게 살거나, 즐겁게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인자와 지자, 딱히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단정할 수 없다. 한우물만 파내어 샘물이 나오는 것도, 이 물 저 물 옮겨 다니며 서핑을 즐기는 것도 저마다의 성향이다. 백화점 명품관의 상품이건 대형 할인점의 원 플러스 원의 물건이든, 수요와 공급은 있다. 오로지 고상한 품격을 택하든 두 배의 보너스 인생을 택하든 자유다.
인자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털끝만큼도 참지 못한다. 초나라의 굴원屈原처럼 상수에 뛰어들어 물고기의 밥이 될지언정, 지켜야 할 절개가 있다.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살지 않는다. 창랑滄浪의 물이 탁하면 발 씻고 물러 나온다. 도무지 타협할 줄 모른다. 추방당하면 바로 부엉이바위거나 빌딩 옥상이거나 강물이거나 나무에 목을 매단다. 그러나 지자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평화’라는 이름으로 군대를 파병하기도 하고, 어제의 적군과 손잡고 만세 삼창의 융합도 잘한다.
조용히 먹을 갈고 예의를 지키며 엄중하게 자신을 지킬 것인가. 롤러코스터, 서핑, 행글라이더, 오토바이로 질주할 것인가. “굿샷!”을 날리다가 벼락의 “나이스”를 꿈꾼 적이 없으니, 나에게 지자는 멀기만 하다. 그렇다고 인자라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그래도 굳이 나누라고 하면, 나는 칠판 앞에서 심판받거나, 200자 원고지 틀에 갇혀 ‘서로서로讀서로’ 규장각의 서책에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다.
고요한 가운데 움직이는 정중동靜中動. 가늘고 길게 누릴 것인가, 굵고 짧게 즐길 것인가.
아~ 산 절로, 수절로, 요산요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