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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의 초례청

4월의 빛깔


쉼터를 찾아야 했다. 조용하되 외지지 않고 멀리 있지 않아 가기 쉽고 적당히 흙 길 밟아가며 산책도 할 수 있는 곳. 사계절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은 혼자라서 더 근사하게 보이는 그런 곳을 찾고 있었다.

 

시립미술관 앞 조각공원을 자주 찾는다. 뿌연 황사마저 아른아른 좋다. 나른하게 졸음에 빠져들게 하는 햇살과 어우러져 봄의 향기에 젖는다. 벚꽃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줄기 가는 바람이 스친다. 나풀나풀 꽃잎이 가볍게 책 위로 떨어진다. 옛날 어느 시인묵객은 떨어진 꽃잎들을 비단주머니에 담아 흙에다 묻어주었다지 흉내라도 내볼까 손으로 쓸어모아본다. 

 

일 년 열두 달을 사계절로 구분한다면 3 4 5월은 봄이다. 3 4 5월을 다시 나이로 본다면 30대 40대 50대로 나눠보고 싶다.

 

봄기운에 이끌려 걷다가 솟아나는 풀들이 건네주는 인사가 있는 3월은 무슨 일을 시작하기가 좋다. 4월은 비가 오는 날이라야 제 빛깔이 난다. 연두 빛 새잎, 은근한 노란색의 산수유 꽃, 등불을 켜 놓은 듯 볼그스름한 진달래는 걸으면서 봐야 더 밝다. 5월의 봄은 조금은 수선스럽다. 뜰 안으로 사람들을 모은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가족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삼십대가 가장 힘들었다. 살림 초보자로서 어설프기만 했던 신혼생활, 두 아이엄마 노릇도 어려운데, 시집어른들 동서 간들 어느 한 사람에게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문제는 다 잘하고 싶은데 있었다. 예! 예! 방긋방긋 웃으며 종종걸음 치던 밤이면 녹초가 되어 그냥 길게 오래도록 잠을 자고 싶었다.

 

어머님은 잔치를 자주 하셨다. 울안에 매화꽃이 피기 시작해서, 쑥이 제철이라서, 이름을 붙여가며 친지들을 청하여 마당놀이를 즐기셨다. 그때마다 냉장고 문에 차림표가 붙었다. 새색시 한복빛깔처럼 영산홍 꽃이 고운 오월 어느 날, 차림표 맨 위에 ‘惜春會’라고 적혀 있었다. 

 

‘석춘회’ 봄을 아끼다. 봄을 아끼는 모임이라. 져버리는 꽃이 아깝다는 말인가, 가는 세월이 아깝다는 말인가를 되 뇌이다 울컥했다. 시어머니 이전의 다른 이름으로 인생의 선배로서 애절하게 고왔다. 그때 어머님은 막 오월의 오십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오면 받아들이고 가면 보내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인위적인 노력을 얕잡아보며 담담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이에 맞는 교실로 들어왔다. 한 해 한 해 그때그때의 나이가 나에겐 딱 알맞았다.

 

촉촉이 물 오른 사월, 나의 자존심은 뭉개지고 있었다. 부인과 대기실에 앉아 책을 보는 척하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애 아비인 듯한 사내는 배가 남산만한 아내에게 속살거리고 있다. 그들 부부는 생전 늙지 않을 것만 같아 부러웠다. 중년의 아주머니는 새빨간 쫄 바지를 입고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지만, 짙은 화장 속에서 배어 나오는 연륜은 이미 초여름에 들어선 듯 보였다.

 

병원 가는 날이면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옷을 갈아 입어본다. 요란하지도 않고 또한 초라하지도 않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그윽함에 최면을 걸며 우아(優雅)를 떨고 있다. 어머님처럼 ‘석춘’을 만끽하기도 전에, 계절을 구별 못한 찬 기운이 앞 당겨 서릿발을 쳤다. 순리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선뜩한 바람이 휘~익! 지나간다. 쌓인 꽃잎들이 화르르 날아간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잔뜩 무겁게 물을 머금고 있다. 이래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서둘러 미술관 안으로 들어왔다. 차 한 잔을 빼 들고 공원이 넓게 내다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어느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원형의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은 ‘내 머리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주제곡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이 경쾌한 음률을 타고 통 통~♪♬ 튀고 있다.

 

창 밖 가득 4월의 빛깔이 번진다.

 

 

 

<<매실의 초례청 >> 2008

 

 


류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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