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희 2017. 2. 19. 11:41

수이부실(秀而不實)



가만있으면 ‘50점’이라는 말이 있다. 

 

전에 나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갇혀 있었다. 어쩜 지금도 그 증세에 휘둘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한 사람의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했다. 진이 빠진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팠다.

 

중용(中庸)이라는 잣대가 있다. 중용을 1과 100 사이의 50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선(善)과 악(惡)으로 중량을 재는 사람도 있다. 나는 중용을 시소게임에서의 균형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쪽이 무거우면 가벼운 쪽은 공중에 떠 있을 수밖에 없다. 평형을 맞추려고 앞으로 나앉기도 하고 한 명을 더 안고 타기도 한다.

 

다수가 꼭 옳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요즘 51을 취하고 49를 버리는 연습 중이다. 어느 모임이나 혹은 단체에서 의견을 분명히 밝혀 깍두기 무를 썰듯 방정하게 정리를 해줘야 할 때가 있다. 책임을 진 자리에서 미적미적 혼자 좋은 사람인 척하다가는 실무자들이 대책 없이 소낙비를 맞는다.

 

나이가 들수록 “지갑은 열고 지퍼는 닫아라.” 라고 한다. 오늘 밥값은, 찻값은… “내가 쏠게요.” 만 잘하면 된다. 돈의 무게는 힘을 싣는다. 지갑을 열면 돈만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말도 쏟아진다. 비비탄처럼 쏟아지는 말이 또 말썽이다.

 

노신(魯迅)의 글 중에 <헛, 허허허허!> 라는 산문이 있다.

옛날 어떤 집에서 아들을 얻어 집안에서 잔치를 했다. 축하손님들이 아이를 보고 크면 부자가 되겠다, 크면 벼슬을 하겠다며 덕담을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나중에 분명히 죽을 겁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죽도록 때렸다고 한다. 사람이 태어나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부자가 되거나 벼슬을 할거라는 건 거짓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거짓말은 좋은 보답을 얻고, 진실은 죽도록 얻어맞는다. 그때 그 이야기를 듣던 소학교 학생이 “선생님, 저는 거짓말도 하기 싫고, 얻어맞기도 싫어요. 그러려면 어떻게 말해야 하지요?” 라고 말한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그래, 그럼 이렇게 하려무나. 우와~! 이 아이는 정말! 얼마나… 어이구! 하하! 허허허 헛, 허허허허!” 라고 일러줬다.

 

바른말이 때론, 사람을 다치게 한다. 순간을 외면한 채 얼버무리는 것이 노신의 글에서처럼 상책일 때가 있다. 나는 노신처럼 민족의 지도자도 아니면서…, 얼마 전 설익은 짓을 했다. 명분을 앞세워 대변인처럼 나섰다. 국어도 모르고 산수도 모르니, 주제 파악도 못 하면서 분수도 못 지켰다.

 

과일 중에 ‘무화과(無花果)’가 있다. 말 그대로 꽃을 피우지 않은 체 열매를 맺는 과일이다. 열매가 예쁘지도 달콤하지도 않다. 농익으면 만지기만 조심스럽다. 치아가 성치 않은 노인네들이나 좋아할까, 그렇지 않으면 저절로 떨어져 버릴 열매다. 어머님은 물컹한 무화과로 잼을 잘 만드셨다. 빛깔과 맛이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은 중용(中庸)의 맛이다.

 


공자, 가라사대. “싹은 났으나 꽃이 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子曰 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 - 자한편)

 


그렇다. 어느 분들은 무화과처럼 꽃도 피우지 않고 열매만 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임승차족’이다. 그들은 가만 놔두면 당당하게 목적지에서 내릴 것이다. 그들의 처세술이다. 나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 꼭 내가 나서서 정의로울 필요도 없다. 그런데 나는 그날 못 본 척 지나치지 못했다.

 

무화과는 겉모양이 수더분하고 소박하지만 조금 익어 틈이 벌어지면 열매속에 불개미떼들이 버글거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조금이라도 더 단맛을 먹으려고 혀를 날름거린다. 먹고 있든, 먹히고 있든, 일단 말이 없어야 한다. 이럴 때, 성질 급한 놈이 먼저 나선다. “야! 줄 똑바로 서!” 단맛은커녕, 불개미 동료에게 물려 죽거나 따돌림으로 쫓겨날 판이다.

 

멀찌감치 물러서서 “우와~, 우와~”만 연발하다가 무화과 잼이나 만들어 먹었으면 좀 좋았을까. 바른길이라고 깃발 꽂아놓고 헛웃음만 날린다. 이 맛이 단맛이라고 부추기던 개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 혼자 헛웃음을 웃어본다.

 

“헛, 허허허허!” 

나, 돌아가고 싶다. 착한 여자로!




*  2012년 <<문학도시>> 4월호

* 2015 <<논어 에세이 빈빈>> 2015


류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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