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꽃향기 코끝을 스치더니
예지용화(禮之用和)
찔레꽃 울타리가 문지기인 양 반긴다. 불빛에 ‘惠仁(혜인)’이라는 현판이 보이고 강아지 한 마리가 반긴다. 낯선 사람들을 보고 짖기는커녕 꼬리를 흔드는 것을 보니 사람이 퍽 그리웠던 모양이다.
예로부터 그 집안의 선비를 보려거든 마당에 핀 꽃을 넌지시 살펴보라고 했던가. 글만 읽는 선비라면 사군자를 벗 삼았겠으나, 도연명 같은 이는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선생이라 칭하며 산수 자연을 벗 삼는 시풍을 즐겼다고 한다. 점잖은 척하는 선비는 어떤가. 백목련이나 백작약을 심어 드러나지 않는 은근한 운치를 즐겼을 터. 혹 들어내 놓고 기방 여인네 치마폭에 난이라도 치는 풍류객이라면 붉은 모란꽃이나 해당화도 마다하지는 않았으리라.
산속에서나 볼 수 있는 둥굴레, 꿀풀, 초롱꽃, 붓꽃, 족두리 꽃, 원추리, 할미꽃의 백두옹(白頭翁) 풀꽃들이 울안 가득 피어있다. 나무라야 기껏 정강이 크기만한 치자나무 몇 그루에 핀 꽃이 소담하다. 흔한 정원수가 없는 뜰에서 주인의 소박함이 엿보인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 한 칸 지어내니 반 칸은 명월이요 반 칸은 청풍이라. 산과 들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오래전부터 간직한 나의 뜰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런 뜰 한번 가져봤으면… ’ 하는 바람이 마당을 탐내게 한다.
오늘 관례(冠禮), 겨레(笄禮)의 시연을 위해 종일 긴장했던 마음을 따뜻한 물로 씻어 냈다. 낮에 분장했던 얼굴들보다 해 맑다. 화장기 없는 민얼굴이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마루 문을 여니 그믐인가 칠흑 같다. 문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한꺼번에 울려 퍼지는 ‘초 여름밤의 합창’ “개굴개굴 개구리♬” 아〜 얼마 만에 들어보는 소리인가. 아마도 앞이 온통 무논인가 보다.
정담이 오간다. 강의실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다지던 면학 분위기는 접어두자. 까만 밤 찬 공기 스며드는 이슥한 시간, 우린 그 시간 속에 멈췄다. 집안 어느 벽 어느 구석에도 시계나 전화선 등 문명의 이기는 없다. 오로지 우리만 있다. 머무는 동안 최상의 대접을 하는 집 주인의 배려다.
여름밤 삼경에 전국각지의 선생들이 야생화초 가득한 뜰 안에서 한마음이 된다. 둘러앉아 산 세월의 순서대로 한 사람씩 일어나, 익은 물 바리 탕기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한가득 부의주(浮蟻酒)를 담아 몇 순배의 향음주례(鄕飮酒禮)로 의식을 치른다. 서로 마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인가. 온몸이 따뜻한 기운이 감돈다. 앞에 앉은 사람들이 그림처럼 마음의 벽에 걸린다. 이 밤 우리는 박물관 안의 풍속화가 되어도 좋고 신선이 되어도 좋다.
앞마당을 지나 차 방으로 옮겼다. 솔솔 물 끓는 소리가 난다. 조그만 풍로가 세 개의 솥발〔鼎足〕로 버티고 서있다. 솥에 새겨진 꿩〔불새〕 표범〔바람 짐승〕 물고기〔물벌레〕 문양이 해학적이다. 바람이 불을 일으켜 물을 끓게 한다더니, 한잔의 차가 심신을 맑게 한다.
예의 쓰임은 조화가 귀함이 되니, 선왕의 도는 이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그리하여 작은 일과 큰일에 모두 이것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행하지 못할 바가 있으니, 화락만을 알아서 화합하고 예절로서 조절하지 아니하면 또한 행할 수가 없다.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 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 학이편)
우리는 예(禮)의 쓰임을 위해 화(和)하여 모였다. 오늘에야 비로소 예(禮)의 터전에 씨를 뿌린 셈이다. 이미 전통예절 선생으로 활짝 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씨앗은 싹을 틔워 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또 싹이 나더라도 떡잎만 무성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 다른 선생들은 마당에 꽃들처럼 각자 선 자리에서 제 빛깔 제 모습으로 피어날 것이다. 열매를 맺어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고 계승하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어스름 빛이 스민다.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확 끼얹듯이 들어온다. 물안개 자욱한 논에 모내기는 어제 마쳤는지 이발한 듯 단정하다. 희뿌연 안개와 어우러진 연둣빛 새벽, 일부러 찾아온 듯한 한 쌍의 두루미가 우아한 자태로 맞이한다. 우리들의 심장박동 소리처럼 시계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옛 문헌을 뒤적이다 시 한 수 읊어 주는 운치나 누려볼 참이다.
夢裏微聞薝蔔香 꿈속에 치지꽃향기 살랑 코끝을 스치더니
覺時一枕綠雲凉 눈을 뜨니 베갯머리 한기가 서리네
夜來忘却掩扉臥 문 걸어 잠그는 것 잊고 잠들었던 게지
落月二峰陰上床 산봉우리 사이로 지는 달빛이 슬며시 침상 위로 오르네
-황경인-
내 마음 밭에 치자나무 한그루 옮겨 심는다.
<<논어 에세이, 빈빈>>2015
류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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