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에세이, 빈빈

병영 도서관

류창희 2017. 2. 20. 12:10


부지 교지(富之敎之) 

 



집의 큰놈은 해군이었다. 바다가 가까운 부산에 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학교나 사회생활이 고단했었는지 외려 군대생활을 활기차게 잘했다. 잘한 정도가 아니라 신바람이 났었다. 군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에 관심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중,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 3시간만 자고 책을 읽었다고 한다. 군대에서의 잠이란 본능의 휴식시간이다. 그런데 밥보다 귀한 수면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는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진작 중고등학교 시절에 그렇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문제는 군대에 읽을 책이 별로 없다며 집의 책을 들고 나갔다. 

 

그때 읽은 책을 보면 밑줄을 긋고 메모를 꼼꼼하게 한 흔적이 책갈피마다 가득하다. 책을 보면서 적어놓은 메모나 힘든 날의 일기도 몇 줄씩 적혀 있다. 남자들이 군에 가는 시기는 평생에 가장 건강한 시기다. 몸만 건강한가. 정신무장이 완벽한 시기다. 국가와 사회, 이성과 지적 욕구로 충만한 시기다.

 

그때 나는 막연히 꿈꿨다. 그 또래 아들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아직 도서관 일을 하기 전이다. 혹여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과 함께하리다. 꿈도 야무지다. 그러나 꿈꾸는 자 앞에는 반드시 꿈이 펼쳐진다. 내가 사는 지역 안에 작은 도서관이 설립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곳에서 나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 재능나눔봉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도서관 관장 일을 맡게 되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전국에서 단일 브랜드로는 가장 큰 1만 세대 정도의 대단지다. 도심 속의 주거단지지만 지역적인 특성이 있다. 풍광이 수려하여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기대와 장산이 있다. 부산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청정지역이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운 곳에 펜션이나 음식점 등 위락시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 설만도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산책로를 살짝 빗겨난 깊숙한 곳에 군부대가 속속 들어앉아 있다. 일반 시민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안온하고 따뜻한 주거단지와 군부대는 차로 불과 10분 거리이다.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염유가 수레를 몰았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백성들이 많구나.”염유가“이렇게 백성들이 많으니, 다음에 무엇을 더 보태야 합니까?”하고 묻자, 공자, 가라사대.“백성들을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염유가“백성들이 부유하게 된 다음에는 무엇을 더 해주어야 합니까?”하고 묻자 공자, 가라사대. “백성들을 교화해야 한다.”

(子 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 자로편)

 


마침 내가 맡은 작은 도서관은 용호 중대의 아래층이다. 제7508부대 2대대와 자매결연을 하였다. 바로 내가 꿈꾸던 군(軍) 관(官) 민(民)이 함께하는 도서관 역할이다. 도서관은 운영위원과 자원봉사인 사서 선생님들 삼십여 명이 모두 무보수로 요일마다 봉사한다. 밥 한 끼 차비 한 푼을 받지 않아도 도서관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오전 오후 교대근무를 한다. 열정적인 봉사선생님들이 있어 나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강의도 하고 홍보도 한다.

 

자매결연한 군부대에 병영체험을 갔다. 병사들이 만든 음식을 같이 먹고 병사들의 숙소와 훈련장과 운동장을 둘러보았다. 나의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더러 어느 병사의 사물함에 빈약하게 몇 권의 책이 있다. 사서봉사 선생님들과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님과 함께 군대 등나무 밑에서 간담회를 했다. 도서관에서 사병들을 도와야 할 것이 무엇인가. 도서관의 장서는 주로 지역주민을 위한 문학책이나 어린이 책들이 많다. 나는 되도록 군대생활을 하면서 관심을 둘 수 있는 기술과학 학술 인문학 등의 책 목록을 제공했다. 그리고 읽고 싶은 희망도서를 신청하면, 임기 동안에는 부족한 예산이나마 우선으로 사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대대장님의 말씀이 책만 가지고 으스대는 나를 한 대 후려졌다. 죽비소리다. 한 자녀 두 자녀 아이들이 외롭게 성장하여 겪는 성장통과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 들었다. 예전처럼 배불리 먹고 사는 것이 어려운 세대도 아니고, 제대하고 나가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세대도 아니다. 그런데 군대 와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폐증이 되며 자살을 하는 병사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어둠 속으로 내모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는 오래전 당당하게 애인을 입대시키던 내 경우를 생각하며 “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느냐?”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땡! 틀렸다. 턱도 없는 오답이다. 요즘 병사들은 여자친구 문제 때문에 탈영하거나 자살하는 청년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럼, 도대체 뭔가? 

 

초,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너는 공부만 잘하면 돼” 엄마 아빠가 다 해줄 것이라며 너도나도 공부선수로 키웠다. 그 아이들은 형제·자매도 없다. 그 외로운 영혼들에는 연예인도 있고 인터넷도 있고 신청만 하면 친한 친구와 함께하는 ‘동반입대’도 있기는 하다. 사귀던 여자친구가 떠나면 인스탄트 세대답게 동기들과 피자 한 판, 닭 한 마리에 맥주 한 캔 시켜먹고, 하룻밤 자고 나면 금세 ‘곰신’따위는 잊는다고 한다. 

그런데 철떡 같이 믿던 엄마 아빠가 배신했을 때, 그들은 갈 곳이 없다고 한다. 집에서 물뿌리고 쓸고, 어른 앞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소학(小學)의 예절을 배우지 못한 채 바로 대학(大學)의 도(道)로 들어섰으니 도무지 치국평천하의 성인이 되기란 어렵다. 몸만 웃자랐지 처세가 힘이 들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스마트폰을 만지고 갖은 정보를 검색하며 키득대는 아이들. 그들은 몸과 마음을 둘 곳이 없다. 검지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밀어내는 중이다. 지독한 고독 속으로 빠져든다. 고된 훈련을 받다가 첫 휴가를 나갔는데…, 엄마 아빠는 각자 알아서 다른 집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세상에 대해, 사회에 대해, 가족에 대해 부모에 대해 분노와 좌절은 더욱더 깊은 수렁으로 빠진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응원할 누나와 같은 엄마와 같은‘멘토’가 되어달라는 말이다. 학교와 군대, 사회를 연결해주는 적응기간 동안 마음을 둘 수 있는 여지(餘地)가 필요하다. 교육이라는 것이 교과서 안에서만 있는 줄 알았다.

 

어찌 내 아들만 아들인가. 모두가 우리의 아들들이다. 우리 사서봉사 선생님들은 그들의 누이이며 어미이다. 매주 월요일마다 제복을 입은 장병들이 도서관 서가에서 책을 살펴보고 몇십 권씩 대출하는 모습이 뿌듯하다. 내 눈에는 군복 입은 씩씩한 병사 한 명 한 명 청년들이 다 자랑스러운 한류스타들이다.

 

세상에 군인 만큼 건강하고 순수한 정신의 소유자가 또 있을까. 그들에게 충성! 단결! 필승! 이다. 병사들에게 도서관이 있다는 것은 부자를 꿈꾸게 하는 것보다 귀한 자산이다. 병영도서관의 역할, 만세, 만만세다.

 



<<논어에세이, 빈빈>>



류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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