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에세이, 빈빈

여자 & 남자

류창희 2017. 2. 20. 12:05

요조숙녀 & 군자호구 (窈窕淑女 君子好逑)



연분홍 치마, 바람에 휘날리다 


한동안 ‘진달래’ 시리즈 우스갯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진짜 달래면 주나?” 언감생심, 이 글을 쓰는 나는 좀 까칠하답니다. 염색을 거부하는 흰머리 소녀죠. 경고하건대 점잖은 선비는 흰 달래를 넘보지 않습니다.

 

청첩장들 받아보셨죠. 여자들은 봄에 시집을 간답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음력 3월 3일, 삼월 삼짇날은 음기(陰氣)가 깊은 계절입니다. 봄바람이 겨우내 껴입었던 여인네의 속곳을 벗기게 되는데요. 연분홍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나물을 뜯으러 갑니다. 이름 하여 ‘화전(花煎)놀이’입니다. 찹쌀을 동그랗게 빚어 진달래꽃 한 송이씩 얹어 번철에 지져내는 꽃전입니다. 꼬맹이 소꿉동무들이 캐는 달래 냉이 씀바귀 정도의 들나물을 캐는 수준이 아니랍니다.

 

화전놀이 가는 아녀자들의 자태가 곱습니다. 아지랑이 아롱아롱 피어오르는 산등성을 오르노라면 마른나무 가지 사이로 다문다문 핀 진달래꽃이 환하죠. 자세히 눈여겨 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꽃잎 빛깔이 제각각 다르답니다. 흰달래, 연달래, 진달래, 난달래, 안달래 빛깔이죠. 진달래꽃은 홑겹 명주 치마보다도 실루엣이 얇습니다. 일명 두견화(杜鵑花)라고도 하는데 꽃술에서 들리는 두견새 울음소리가 애절한 규방가사입니다.

 

선녀들이 있는 곳을 나무꾼들이 훔쳐봅니다. 휘파람소리 들리시나요? “에구머니! 남세스러워라.” 과수댁이 놀란 듯 벌떡 일어나 훠이훠이 쫓아내는 시늉을 하며 앞장섭니다. 치맛바람에 제비쑥 ‧ 원추리 ‧ 참취 ‧ 잔대와 홑잎이 뾰족뾰족 솟아오릅니다. 봄 처녀는 짐짓 나물 캐어 담는 다래끼를 떨어뜨립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청년이 다래끼를 집어들고 냅다 뛰어가며 “나, 잡아봐라~!” 숨바꼭질을 합니다. 어디 압구정동에만 로데오 거리가 있나요. 신사동 가로수 길에만 ‘야타족’이 있나요. 흐드러지게 핀 꽃뿐이던가요. 덤불 속에 찔레순까지 손짓하며 부릅니다. 산과 들, 천하가 온통 *요조숙녀 군자호구(窈窕淑女 君子好逑)입니다.

 

잠깐! 여기서 꽃 빛깔은 여성의 치마 빛깔이 아니랍니다. 유두(乳頭) 빛깔입니다. 예로부터 유선이 봉곳하지도 않은 생리 이전의 흰달래 어린 소녀를 범하면 동산에 난데없이 하얀 진달래가 피었다고 합니다. 나라에 변고가 생겼다고 한탄을 하였다지요. 요즘 연분홍빛의 연달래 아가씨들은 혼기가 넘어도 아이와 남편, 고부와 장서의 갈등에 지레 겁을 내어 결혼을 꿈꾸지 않아 걱정이라죠. 활짝 핀 농염한 진분홍빛의 진달래 마님들은 자체만으로도 으뜸인데, 보톡스 문신 피부박피로 청담동 사모님 풍을 꿈꾸고, 멍석 위에 널어놓은 푸르스름한 팥알 빛깔의 난달래 대비마마님들의 다이어트와 건강식품도 날개를 단 듯 팔린다고 합니다. 세상은 이제 된장에 호박잎 쌈만의 자연 맛이 아니랍니다. 얼굴만 보고 여자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벅머리 청년도 여인의 뒤태만 보고 쫓아왔다가 “안달래”라며 손사래로 내칩니다.

봄은 여자의 계절입니다. 왜냐구요? 여자는 봄에 바람이 나니까요.

 


* 공자 가라사대. “《시경》관저편은 줄거우나 문란하지 않고, 애처로우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 팔일편)

 “관관소리를 내고 우는 물수리새는 모래톱에 있네,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배필이로다.”

(關關雎鳩 在河之洲 窈窕淑女 君子好逑  - 시경 관저편) 

 

 


도포 자락, 바람을 타다 

 


그대는 가을 남자, 남자는 역시 ‘욱!’ 하는 성질이 매력입니다. 열 받은 마음을 비우는 ‘허심(虛心)사상’으로 열자(列子)는 보름씩 바람을 타고 다녔다는데요. 옷깃을 여미게 하는 찬바람이 불면, 사랑은 낙엽 따라 가버리고, 옆구리 시린 외로움만 홀로 남아 바바리 깃을 세웁니다. 이름 하여 ‘가을 남자’입니다. 옳거니! 그리하여 남자들은 양기(陽氣)가 가득 충전되어 가을에 장가를 간답니다.

 

가을은 일 년 중 가장 양기가 충만한 계절입니다. 특히 음력 9월 9일 ‘중양절’ 즈음에서 바리톤의 목소리로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을 불러야, 살랑살랑 실바람을 잡아타고서 넘실넘실 ♬ 오색가을이 온답니다. 단풍과 국화가 그윽한 이름 하여 ‘풍국(楓菊)놀이’입니다. 선비들은 의관을 갖추고 풍로 하나, 술잔 하나, 종이 붓 먹 벼루의 문방사우를 들고 산에 오릅니다. 요즘 남정네들이 불꽃처럼 뜨거운 중년의 사랑을 꿈꾸는 ‘꽃탕’하고는 격이 다르죠. 동서양을 넘나들어 장글장글한 볕을 그리워하며 백석은 '귀농'을 꿈구고, 리처드 기어도 ‘뉴욕의 가을’을 찍고, 릴케도 덩달아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달라.’라고 가을날을 읊었습니다.

 

시서화(詩書畵)를 즐깁니다. 반드시 장원을 뽑아 면류관을 씌워 어사화를 꽂는 벼슬만이 삶의 목표인가요. 어디 신흥 사대부 ‘사’ 자들만 대접을 받아야 하나요. 백일장, 휘호 대회, 그림을 그리고 관람하는 일은 예(藝)에서 노니는 서민들의 문화입니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고 푸념해봐야 누가 알아줄까요. 우리네 인생이 그때 그거 해볼걸, 해볼걸, 걸, 걸, 껄껄대다가 저승으로 간다지요. 받으시게 따르시오, 주거니 받거니 어사주나 벌주나 수작(酬酌)하는 묘미는 한마음이 되는 건배입니다. 내 안에 그대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고? “누가 오라 하였기에 가을이 벌써 왔단 말이냐?” 취옹선생의 추성부를 서글프게 읊조린들, 가는 세월을 어찌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남산에서 국화를 캐다가 동쪽 울타리에 심어놓고 인생의 석양을 즐겼다는 오류선생처럼 한 글자, 한 문장, 음률 넣어 오언절구면 어떻고 칠언절구면 또 어떻습니까. 굴원의 어부사도 독야청청 지내보니 궁색하나마 마음은 청아하고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쑥부쟁이, 구절초, 감국, 산국을 즐기며 국화주(菊花酒)를 마십니다. 술기운에 그동안 체면으로 졸라맸던 갓끈이 풀어집니다. 소슬바람이 상투 머리를 빗질(風櫛)하며 지나가면, 알 딸딸 앞에 앉은 사람 둘이런가 셋이런가 으스스 한기가 서립니다. 동여맸던 허리끈을 풀고 시원하게 한줄기~, “에헤라 디야~♪” 일 년 내내 바짓가랑이 안에 갇혀 있던 물건을 따끈한 햇볕과 신선한 바람이 거풍(擧風)을 시켜줍니다. 어느 누가 그토록 살가운 애무로 탱글탱글하게 해줄까요. 

 

가을은 남자의 계절입니다. 왜냐구요? 남자는 가을에 바람을 타니까요.

저도 어언간 붓을 들어 풍류를 논할만한 진달래꽃이 되었습니다. 진 ‧ 달 ‧ 래 ‧  진짜 달라면 주느냐고요? 내 집 아궁이에 불 지피지 않는 ‘집밥’만 아니라면 몽땅 드립니다. 

이 가을, ‘풍즐거풍(風櫛擧風)’의 낭만을!

 

 


 


《에세이 부산》12호 (2013년)

《양주골 문학》7호 (2013년)

<<논어 에세이 빈빈>>2015


류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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