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앵도나무여!
당체지화 (唐棣之華)
산앵도나무 꽃이여!
내가 《논어(論語)》를 강독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귀를 쫑긋하거나 눈길을 슬쩍 피하며 얼른 다른 곳을 바라본다. 혹시 잘못 들었나 하는 눈빛이다. 어느 분은 대 놓고 “어쩌면 그렇게 고상하게 놀아요?.” 그러나 대부분은 언제 그렇게 어려운 공부를 했느냐고 묻는다. 그 뒤에 후렴처럼 젊은 여자가…, 여운을 남긴다.
먹물 색이 아직 진한 어르신들은 논어의 한두 구절쯤을 줄줄이 외고 나서 지식인임을 자처한다. 사모관대 의관을 갖춘 남정네들의 영역이지 아녀자들의 치마폭 속에 있는 학문이 아니라는 눈치다. 논어는 그만큼 높은 사대부 대접을 받아왔다.
논어교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종심(從心)의 나이 칠십 대를 넘은 분들도 있지만, 이제 막 불혹을 넘긴 이들이 대부분이다. 군자가 어디 따로 있는가. 내가 아직 며느리 아내 어미 주부로서 살고 있으니, 그 역할 안에서 공자님을 만난다.
성인의 말씀은, 절대로 크지 않다. 구절구절 새겨 읽으면 본질은 소박하고 수더분하다. 같이 소리 내어 읽는 분들은 물질에 가치를 두기보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정신적인 삶에 마음을 편안히 여기는 분들이다. 삶의 속도로 보자면 질주보다는 기웃거리며 고샅길을 살펴가는 걸음걸이다.
나는 그분들 앞에서 제법 ‘척’을 하는 편인데, 오늘 아침의 신문, 차 안에서 들은 라디오 프로, 어제저녁의 TV드라마, 싱크대 앞에서의 내 모습, 마트에서 본 사람들의 표정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희한한 건, 어떻게 2천5백 년 전 춘추전국시대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리도 닮았는지. 달라진 건 벡스코 빌딩, 매트로 아파트, 자동차, 컴퓨터, 휴대전화기, 등의 첨단적인 기술일 뿐, 사람 사는 이치나 마음의 씀씀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치도 변한 것이 없다.
나는 한학을 공부하면서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날들이 많았었다. 그때마다 오래전 마음 밭에 심어놓은 한 구절을 되새기곤 한다.
산앵도나무 꽃이여! 바람에 나부끼는구나. 그 화사한 꽃을 어찌 그리워하지 않으리오마는, 내 집에서 너무 멀다고 한다. 그때 공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음에 두지 않은 것이리니 어찌 저 멀리 있다고 말하리오. (‘唐棣之華여 偏其反而로다 豈不爾思리오마는 室是遠而니라 子曰 未之思也언정 夫何遠之有리오 -子罕-’)
이 세상의 아무리 높고 깊은 사상이나 학문도,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면 글을 읽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를 일깨우는 문구가 내게로 와 꽃씨가 된다. 내 마음에 싹 틔워 내 사랑 내 곁에 두는 ‘근사(近思)’다. 내가 부르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내 곁으로 달려와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누군가에게 인(仁)을 실천하고 싶은데 가진 것이 없고, 사랑을 나누고 싶지만, 상대가 없으며, 공부를 하고 싶어도 두뇌가 명석하지 못하고, 운동을 하고 싶으나 시간이 없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만 다 마음에서 멀기 때문이다.
한 줄 한 줄 자신의 생활에 견주어 읽으며 “논어가 이렇게 쉬운 것인 줄 몰랐어요.”“공자님 말씀이 재미가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꼭 우물가가 아니더라도 또 신이 나서 “자-왈~” 잇달아 앵두꽃을 피운다. 고리타분하고 촌스럽다고 말하는 공자님의 말씀도 요즘 시대에 걸맞게, 또 내 생활에 맞게 재해석을 한다. 이름하여 ‘수다 논어’이다. 결코, 고전은 고서문헌 속에 박제된 문자가 아니다.
지금 여기, 막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바로 봄 동산에 피어나는 꽃향기다. 공자님은 옹야편에서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했다. ‘樂之者’, 사군자 수채화 외국어 여행 사진찍기 라틴댄스…… 다 접어두자. 아~ 그래! 연두빛깔 봄이 오기 전에 벌거벗은 나무, 나목(裸木)의 크로키(croquis)를 시작하자.
산앵도나무꽃이 바람에 나풀나풀 나부낀다.
* 《논어에세이 빈빈》 2014
<<에세이문학>> 2010 봄호,
MBC사우회 2010<<빛과 소리>>,
퇴계학연구원 소식지 2010년 1월호,
선수필 2010 여름호,
한국현대수필75인선(선수필 10주년 기획)
류창희
http://rchess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