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희 2017. 2. 19. 11:10


연지곤지 찍고 시집으로 들어오던 날, 대문 앞에 마련해 놓은 짚불을 훌쩍 뛰어  넘었다.

짚불을 넘은 다음 날 아침, 나는 동서들과 나란히 무릎 꿇고 앉아 야단을 맞았다. 친정어머니가 준비해준 음식으로 시부모님께 아침상 올리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날부터 20년이 넘은 지금까지 새벽이면 깜짝 놀라 일어나고 아직도 누구 앞에만 앉으면 습관처럼 무릎을 꿇는다.

 

시댁의 부엌구조는 양식과 한식으로 구비되어 있었다. 양식부엌은 보통 아파트구조와 같고 한식 부엌은 장작을 넣는 아궁이와 별도의 연탄아궁이가 따로 있었다.

 

불은 새댁인 나에게 있어 애물단지였다. 네 마리나 되는 진돗개의 끼니를 위해 늘 통보리를 푹 퍼지게 삶아야 하고 대추차를 우리고 빨래를 삶아 잿물도 내야했다. 불이 붙어있는 한 한가할 틈이 없다. 내가 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불이 나를 감시했다.

 

연탄재가 엉겨 붙어 나오지 않으면 불기운이 이글거리는 아궁이에 얼굴을 들이대고 빼내야 하는데 얼굴도 불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운이 좋아 재까지 따라 나온 날은 무쇠칼등으로 내리친다. 반쯤은 깨뜨려 겨우 불씨만은 보존하지만 이도 저도 안 되는 날은 박살난 불씨 앞에 망연자실 눈물이 나왔다. 산자락에 자리 잡은 시댁은 이웃도 번개탄도 없었다.

 

남편이 근무하던 거제도 섬으로 살림나던 여름날의 행렬은 화려했다. 까만 승용차에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가 타고 있었다. 그 날 어머님은 우아했다. 해외나들이 때 사 오신 모자가 어느 나라 여왕처럼 어울렸다. 차로만 꼬박 한나절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작업복을 입은 새댁이 타고 있는 트럭의 이삿짐 속에는 올림픽 성화처럼 연탄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때론 방위(方位)와 시(時)도 문제였다. 한 시간이면 갈수 있는 집도 방위가 안 맞으면 북방의 동래구를 한 바퀴 돌았다. 이사시간을 맞추느라 어느 한산한 지점에선 멈춰있어야 했으니, 이삿짐센터에서는 시내에서만 빙빙 돌고도 시외요금에 시간초과까지 부르는 게 값이다. 작은아이하고는 시가 맞지 않는다고 아이를 다른 집에 맡겼다가 삼색나물에 조기 한 마리 차려놓고 두 손 모아 싹싹 빈 다음에야 데려올 수가 있었다.

새로 이사 간 집에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단연 연탄불이다. 그 불로 끓인 국과 밥을 조왕신에게 올리고서야 어머님은 차를 돌려 되돌아가셨다.

 

연탄불이 없어지자 어머님은 가스레인지를 새로 사 오셔서 손수 불을 켜셨다. 이삿짐을 부려놓고 조왕신에 딸린 대소가 가족들을 불러 식사를 했다. 그 시간에 먹는 새로 담근 김치는 짜지 않으면 싱겁고, 밥은 되지 않으면 질었다. 아무리 애써본들 그날의 어머님 심사는 누그러지지 않으셨다. 며느리의 기강을 바로잡는 어머님 특유의 교육방법이시다. 나는 다섯 번 이사하는 동안 포장이사에 자장면 시켜먹는 사람들을 제일 부럽게 여겼다.

 

이사하는 것은 힘들다. 오죽하면 악담 중에 또 이사하라는 말이 있을까. 이삿짐을 싸고 풀고 제자리에 앉히기까지 몇 달이고 이 방 저 방 옮겨가며 들었다 놓았다한다. 그러나 정작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이삿날 어머님께 검사 받아야 하는 절차들이  어렵다. 어찌하면 순조롭게 잘 넘어갈까. 매번 긴장을 하느라 짐 정리가 끝나면 달포씩은 꼬박 앓는다.

 

요즘 어머님은 이사준비를 하신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옮겨야 할 형편이다. 아들 셋을 다 짝지어 분가시킨 집을 처분하셨다. 두 어른이 연로하여 장남과 합가를 하신다. 나는 이번 이사를 조왕신을 인수인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각 집에 살면서도 며느리들 다 간섭하시고 당신 손길이 닿아 그나마 라도 잘 살고 있다고 여기시니 당신이 들어가실 집이야 오죽하시겠는가.

 

벌써 몇 달째 병원에 계시면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마음으로 이삿짐을 꾸린다. 생각이 빤하니 마음이 바쁘시다. 아직 이사날짜는 잡히지도 않았는데 혹시라도 며느리들이 제대로 해내지 못 할까 걱정이 되어 벌써부터 성에 차지 않아 야단이시다.

 

어렸을 때 친정할머니는 어머니가 화롯불을 완전히 꺼뜨리면 얼굴에 재를 뒤집어씌우듯 나무랐다. 그 불씨로 조석거리를 끓일 때 불을 지펴야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불씨 지키는 것만이 당신의 소명 받은 삶처럼 불씨에 집착을 하셨다. 성냥조차 귀하던 시절이었다.

 

질화로가 사라지고 연탄불이 없어진 요즘 시대에 불씨는 무엇을 의미할까.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고 가풍(家風)을 바로 세우는 며느리의 정신일까. 여태까지 배운 대로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리곤 행여 잘못하여 꺼뜨릴세라 전전긍긍 어머님 곁을 지키고 있다.

 

새로 이사 갈 집에 하루라도 어머님이 먼저 가서 누우실 거라는 계획은 확고하신데 어쩌자고 백혈구수치는 자꾸 올라가는지.

 

 

 

<<매실의 초례청>> 2008


류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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