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먹는 밥
한창 아이들이 왕성하게 먹어댈 때는 하루해를 밥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매일 시장 봐 나르고 도시락 씻는 소리가 시끌벅적했다. 지지고 볶는 날들에 숨이 차 엄살을 떨면, 그래 힘들겠구나! 위로는 못해주실 망정 어머님께서는 “네가 부럽다” 여자는 자식을 위해 도시락 쌀 때가 가장 행복할 때라고 하셨다.
‘촉촉하게가을비내리니노란은행잎들이보도블록위를밝게만듭니다칼국수를혼자먹으니당신생각’
핸드폰으로 문자를 날렸다. 남편에게서 쏜살같이 전화가 왔다.
“가을 타면 안 되는데… 저녁에 영화나 한 프로”
소슬바람을 일으킨다.
길가 식당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샤브샤브 칼국수를 반값에 세일을 한다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솔깃하여 들어갔지만 일인분은 팔지 않는다고 하니 남편생각이 절로 날 수 밖에.
나는 밖에서 혼자 밥 먹는 일에 익숙하다. 요일마다 장소를 옮겨 다니며 떠돌이처럼 일을 하다보면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먹어야한다. 가끔은 느긋하게 창가에 앉아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하면서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리고도 싶다. 그러나 매일 시간에 쫓기며 잠시 허기를 메우는 수준이니 후루룩 쉽게 넘어가는 국수를 즐겨 먹는다.
어느 소년은 바닷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맡에 덩그마니 식은 밥상이 소년을 반겨주었다. 홀어머니는 새벽부터 갯가에 나가 일을 하기 때문이다. 늘 그렇게 혼자 밥을 먹으면서 자랐다. 그는 새신랑이 될 즈음 예쁜 얼굴에 높은 학력과 부의 열쇠를 가지고 올 아내를 원하지 않았다. 오직 남편 앞에 앉아 “밥 먹는 모습을 바라봐 줄 수 있는가” 는 약속을 받고 결혼했다.
나는 아직 혼자 먹는 밥의 가혹함을 알지 못한다. TV를 벗 삼아 눈물로 간을 맞춘다는 말을 들으면 ‘눈물도 흔하지. 편안하고 좀 좋아’ 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어쩌다 아이들이나 남편이 식사하고 온다는 전화 한통만 받아도 그 시간을 통째로 횡재한 것 같아 고맙게까지 여긴다.
내 수업에 들어오는 한 남학생은 늘 깔끔한 신사복에 흰 와이셔츠가 반듯했다. 여름에는 모시남방이 올곧게 날이 섰다. 저렇게 물 찬 제비처럼 입성 갖춰 내보내는 아내는 어떤 사람일까. 참 보기 좋다. 아내의 인품까지 눈에 선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 새라 넌지시 귀엣말을 한다. “있을 때 잘 하세요.” 설거지가 귀찮아 아침이면 선식을 먹는다며, 후줄근한 차림으로 다니면 먼저 간 아내를 욕되게 하는 것 같아 울면서 다리미질을 한다고 했다. 그에게 다리미질은 혼자 쭈글쭈글 쭈글스럽게 밥 먹는 외로움을 펴는 또 다른 몸짓인 것이다.
고희를 훌쩍 넘긴 선배는 혼자 산다. 남편과 사별하고 자녀들은 장성하여 다 출가했다. 아직 여섯 개의 식탁의자가 있지만 그녀는 늘 혼자 밥을 먹는다. 아이들 생각이 나면 주인공 자리에 꽃을 꽂아놓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운다고 한다. 어느 날 손자 손바닥을 닮은 빨간 단풍잎을 한 접시 담아 가을 숲을 산책하는 상상을 했더니 “신통하기도 하지.” 실제로 귓가에 들리더라며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를 냈다.
얼마 전 기러기아빠가 죽은 지 며칠 만에 발견되었다. 아이들과 아내는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놓고 그는 원룸에서 혼자 지냈다. 평소에 술을 즐겼으며 혈압이 높았었다고 사망원인을 추정했다. 정말 지병 때문이었을까.
식구란 무엇인가. 같은 집에 살며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우아한 선배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지금 당장 가족이 둘러앉아 같이 밥을 먹을 수는 없지만, 좋은 날 가족행사를 알리면 먹을 것을 한 아름씩 싸들고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가족과 연을 잇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날이 갈수록 현대인은 점점 외롭다. 혼자 공부하고 혼자 사색하고 혼자 컴퓨터 앞에 앉고 혼자 밥을 먹는다. 홀로를 위해 장을 보고, 홀로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고독. 어쩌면 현대인들의 죽음은 외로움이 아닐까.
폭발 일보직전일 때가 있다. 소리를 지르며 맞설 배짱이 못되기에 말없이 참다가 눈이 마주치면 주르르 눈물부터 쏟아낸다. 눈을 쳐다볼 수 없는 날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린다. 그러나 정말 화가 날 때의 무기는 따로 있다.
요리를 한다. 아끼는 접시에 음식을 그릇그릇 담아 수저받침까지 곁들여 격식을 갖춰놓는다. 꽃도 한 송이 꽂는다. 그가 콧노래로 코를 벌름거리며 식탁의자에 앉을 즈음, 슬며시 일어나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린다. 내 몸에도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철없는 객기이다.
추적추적 비가 온다. 가을비는 내복 한 벌이라 하더니 춥다. “9988!(아흔아홉 살까지 팔팔하게)” 평생 마주 앉아 밥 먹기를 기원하며 건배를 한다. 된장뚝배기 속에서 잡다한 일상의 재료들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깊어 가는 가을밤, 따끈한 에로영화 주인공이나 되어볼까.
<<매실의 초례청>>2008
류창희
http://rchess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