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양
봉양
- 지어견마至於犬馬
아이는 어미가 출근을 하면서 새벽에 유모차에 실려 62층으로 온다. 번쩍 안아 내 침대에 뉘여도 쌕쌕 콜콜 잘도 잔다. 어스름 동이 터도 일어날 기색이 없다. “굿모닝, 바하” “잘 잤니? 바하” 몇 번을 불러도 기척이 없다. 그때부터 나는 말랑말랑한 작은 손가락을 조몰락거린다. 내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시간이다.
오래전, 글 선배가 모임에 나와 손자 이야기를 했다. 고위공직에 근무하는 어미가 일하러 나가도 무럭무럭 잘 자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할머니” 부르면 더 예쁠 텐데, “안 돼” “때지! 라는 말만 한다고, 베이비시터에게서 가장 먼저 배운 언어라고 했다.
대학병원 의사인 친구도 퇴직 전,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 손자에게 다녀온 소회를 풀어놓았다. 진료하는 딸의 아이를 잠시라도 돌봐주고 싶어 다가가면, 손사래를 치며 “Don't touch!” 돈 터치라며 할머니를 밀어낸다고 했다.
집의 손자 놈도 기저귀라도 갈아줄라치면, “네가 뭘 싼 것 같은데…” 한번 봐도 되겠니? 혹은 옷을 바꿔 입히려고 하는데, 벗겨도 되겠는지 사전에 물어봐야 한다. 그냥 무작위로 제 몸에 손을 대면, 가슴을 싸안고 “안돼요” 이마 위로 두 팔을 올려 X자를 긋는다. 그런 걸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으니 “안전교육”이라 한다. 아마 어린이 집에서 성교육을 받은 모양이다.
내 마음대로 손을 조몰락거리며 만질 수 있는 시간은 아이가 잠이 들었을 때뿐이다. 나는 분명 엄마 품에 안겨 젖 먹고, 엄마 등에 업혀 절구질과 설거지를 하던 엄마의 체온에서 자랐다. 그런데도 지금, 나의 엄마는 마음대로 만질 살갗이 없다. 마음의 병이 깊어지면서 벌써 몇 달 째, 30초도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나를 찾고 패악을 부린다. 병원입원도 수면제도 소용없다.
아기는 아무리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고 들었다. 일부러 우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프거나 졸리거나 아프면 본능으로 울기 때문이라고 한다. 엄마도 지금 본능일 것이다. 물 한 모금을 삼키지 않아 기력이 바닥인데도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고명딸인 나는 엄마에게 내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제발 나를 잊어달라고, 내 곁에서 멀어지라고 포달을 떤다. 깊은 잠에 든 듯, 무조건 가만히 있으라 한다. 그래야 착한 엄마라고, 그래야 내가 엄마를 오랫동안 지켜줄 거라며 임기응변으로 봉쇄한다. 아직 살아있는데 어찌 목소리를 안 내고, 움직임이 없는 영안실 놀이를 할까. 기르는 강아지도 고양이도 마음을 붙잡을 정신도 없다. 세상을 다 잃은 엄마는 어디에서 온기를 찾을까.
자유가 효에 대해서 묻자, 공자 가라사대. 오늘 날의 효라는 것은 이것(물질적)을 봉양하는 것으로만 여긴다. 그러나 개와 말도 길러줌이 있으니.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봉양과 기름을 분별하겠는가.
子游 問孝ᄒᆞ대 子曰今之孝者는 是謂能養이니 至於犬馬ᄒᆞ야도 皆能有養이니 不敬이면 何以別乎리오 - 爲政篇
재작년에 두 번째 양쪽 무릎관절 수술을 하셨다. 그리고 몇 달 후, 섬망 증세가 왔다. 보건소 치매센타로 갔으나 전혀 이상이 없이 점수가 좋았다. 하루에 스마트 폰을 두 개씩이나 샀다. 삼성과 LG폰의 자판 배열이 다르니 당연히 문자 카톡 동영상 사진 찍기 등이 헛갈렸다. 매일 다니던 국선도도 주일마다 다니던 미술학원도 그만뒀다. 자꾸 넘어져 119를 불러 병원으로 아들집으로 신경정신과로 혼자 마음대로 결정하고 다니셨다.
신용카드로 보석을 사고, 옷을 사고 바지를 빛깔별로 7개씩 맞추고 패션안경을 샀다. 그게 전조증상임을 몰랐다. 회춘의 시간으로 알았다. 남편대신 자식대신 평생을 품고 있던 억 단위의 돈도 이리저리 쪼갰다. 남편 부재중에 며느리로써 어미로써 혼자 열심히 살아오신 ‘여자의 일생’을 보상받는 듯 대담하게 멋졌다. 그렇게 여생을 신나게 사실 줄 알았는데, 정도가 심해지자 서로 마음만 상했다.
사사건건 부딪혔다. 최후의 극단적인 선택에서도 살아나셨다. 몸과 마음을 정착하지 못하고 서울 부산을 오가며 허리가 부러지고 고관절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또 고관절이 부러졌다. 이런 뼈의 기능들은 팔순이 넘어도 현대의학은 잘도 째고 척척 잘도 갈아 끼우는 로봇의술이다. 이 병원 저 병원 8층 6층 5층 3층 맨 끝 1인실에서 수술부위는 이상 없이 잘 아물고 있다. 그러나 날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산산이 부서지는 정신은 잡을 수도 인공부품으로 교체할 수도 없다. 몇 년간 엄마의 돌출행위를 의사도 자식도 몰랐다. 전 세계를 마비시키는 악성 바이러스 ‘코로나19’도 치매환자를 피해간다. 안정이 묘약이라는데, 언제쯤 가닥이 잡힐지 시간의 강이다.
병원의 시설, 새로운 의료기기, 의사와 간호사, 간병하는 딸이 무슨 소용인가. 식사수발과 똥오줌을 받아내고 기저귀 갈아주는 ‘봉양奉養’은 개도 소도 누구나 할 수 있다. 오늘도 보호자라는 구실로 경敬의 시간만 지킨다. 공恭의 도리는 불경不敬의 늪에 떨어뜨렸다. 공경恭敬하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는 나는 금수인가, 사람인가.
2020-1~2 '그린에세이' 수록
류창희
메타논어 『타타타 메타』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논어에세이『빈빈』 『매실의 초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