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대
- 명고이공지鳴鼓而攻之
“사랑이 뭐 별거겠어요. 행복이 뭐 별거겠어요. 그대와 함께 같이 잠들고 그대와 함께 같이 깨어나고, 그대와 함께 한 식탁에서 밥 먹는 것, 내게 그대는 사치입니다. 그림 같은 집이 뭐 별거겠어요. 어느 곳이든 그대가 있다면 그게 그림이죠. 빛나는 하루가 뭐 별거겠어요. 어떤 하루든 그대와 함께라면 뭐가 필요하죠. 나 그대가 있지만 힘든 세상이 아니라 힘든 세상이지만 곁에 그대가 있음을 깨닫고 또 감사해요. 또 기도해요. 내 곁에서 변치 않고 영원하길 기도드리죠~ 나만의 그대, 나의 그대, 내겐 사치라는 걸. 행복이란 말이 뭐 별거겠어요. 그저 그대의 잠꼬대마저 날 기쁘게 하는데, 사랑이란 말이 뭐 별거겠어요. 그저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입에서 맴돌죠. 내가 상상하고 꿈꾸던 사람 그대~ 그래 사치, 그댄 사치, 내겐 사치♬.”
출근 길 라디오를 듣는데 차안에 습기가 가득 찼다. 저녁 식사시간, 식구들에게 ‘그대들이 나에겐 모두 사치’라고 말하는데 울컥하다.
“사랑이, 행복이 뭐 별거겠어요.” 그런데 왜 이다지도 그 별거 아니라는 별거가 어려운지. 내 성정의 부족인줄 아리고 쓰려서 알겠는데…, 늘 아라리로 덧난다. 식사 후, 그 노래를 들려주니 며느리는 결혼식 축가로 예식장에서 많이 들어봤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신부가 예쁜지, 장모가 우아한지. 신랑이 반듯한지, 시아버지의 어깨가 당당한지, 세속의 눈으로만 봤던 것 같다.
혼자 감흥에 젖어 “그대가 나의 며느리라서, 그대가 나의 남편이라서, 그대가 나의 아들이라서, 그대가 나의 손자라서 고맙다고 말하면서 일일이 눈을 마주치는데, 모두 별스런 눈총을 쏜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변한다는 말을 생각하는 것 같다.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 챈, 오직 한 사람만이 경쾌하게 “녜, 녜, 할머니!” 화답을 한다. “할머니 좀 안아줘”라고 하니, 냉큼 팔에 힘을 주며 끌어안고는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홍콩으로 함께 가족여행을 갔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들이 사람을 구했으면 한다. 3년 전, 아이들 곁으로 이사했다. 강의하며 아들 손자, 며느리 밥 해먹이고 돌본 공이 하루아침에 파면당할 위기다. 처음부터 공적비를 세울 계획은 아니었지만, 대책 없이 쳐들어온 배은이 서운하다.
손자는 많이 컸다. 의사표현을 곧잘 하고 잔병치레도 거의 없다. 무럭무럭 잘 자랄 것이다. 무엇보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착한 심성과 정서의 씨앗은 뿌렸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아이 돌봐준다고 생색(?)내는 부모가 짐이 되는가보다. 연연하지 말자. 남편도 아이들도 어둔한 내가 점점 불안할 게다. 서운한 감정이 북받치는 건 세월의 쇠함이다.
나는 여한이 없다. 내 힘껏 다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다시 하라고 해도 더 잘할 수 없다. 기운도 없고 흥도 없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되면 아이돌봄 역할은 필요 없게 될 터인데, 고새를 참지 못하고 나의 그대께서 그예 사달을 냈다.
잊히는 것도 사랑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차선이다. 등은 가벼운데 가슴은 맷돌하나 올려놓은 듯 무겁다. 얼마간 지나면 이 무게 또한 감각이 마비될 것이다. 그냥 그럭저럭 살다 가면 그만이다. 서른 즈음에 어미라는 숭고한 이름을 얻고서 모자간에 얼굴 붉히거나 언성을 높인 적이 없다. 모두 아깝고 소중하다. 며느리도 내가 낳고 가르쳐도 그리 예쁘게 키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미 소중했던 한 사람을 잃었다.
왜, 진작 모진세월 앞에서 아내를 지켜주지 못하고. 하필, 내 일상의 귀한 아들 손자, 며느리 앞에서 관계를 곤죽으로 만드는지. 아들의 ‘그대’와 아비의 ‘그대’의 간극이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 말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오늘밤 문득 모두 드리리♬”
별은 따다가 뭐하자는 물건인지, 별꼴이다. 이순 넘은 여자에게 남편은 어떤 존재인가. 오직 같이 낳은 자식 흉보는데 필요하다. 그는 본분을 잃었다. 홍콩 란카이펑 밤거리에서의 해프닝이다.
부자간에 다 그대들의 아내, ‘그대’가 소중하다는 주장이다.
계씨가 노나라의 주공보다 더 부자인데도, 염구가 그를 위해서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심하게 거둠으로써, 계씨의 재물을 더욱 불려주었다. 이에 공자가라사대 “염구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자네들이 북을 울리고 그를 공격해도 괜찮다.
季氏富於周公이어ᄂᆞᆯ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ᄒᆞᆫ대 子曰, 非吾徒也로소니 小子아 鳴鼓而攻之可也니라 - 先進篇
나의 그대도 공자의 제자 염구처럼, 맡은바 임무를 평생 성실하게 잘 수행했다. 다만, 아군과 적군의 분별이 남의 편일 뿐이다. 결국 지는 편이 내편이다. 희망의 북을 친다. 해보나마나 뻔- 한 승부,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을까.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져주는 거다.
2019 -11~12 '그린에세이' 공자가라사대 연재 중
* 류창희
메타논어 『타타타, 메타』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논어에세이 『빈빈』 『매실의 초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