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방
카톡방
류창희
“카톡. 카톡. 카톡.”
내 귀의 의지와 상관없이 날아온다. 아홉 명 방도 있고, 네 명 방도 있고, 스물 네 명이 공유하는 회원방도 있다.
어느 학회는 100명 넘는 인원이 단체로 들어온다. 아~, 안보고 싶다. 다 무음으로 설정했다. 한참을 잊고 있어도, 소리 없는 글들이 1. 2. 3. 4. 읽지 않은 사람 숫자까지 체크하며 어서 보라고 다그친다.
4명의 식구도 바람 잘 날이 없는데, 쌍둥이도 어미뱃속에서 한 공간이 갑갑하다는데, 24절기 바람이 다 분다. 대부분 훈풍이다. 훈풍은 꽃을 부른다.
아~, 나는 겁난다.
하얀 눈 속에 붉은 동백이 필까, 때 이르게 매화가 서둘러 필까, 아니면 산골짜기 양지바른 곳에 진달래도 남몰래 필까도 겁난다. 어찌, 너 혼자만 꽃을 몽땅 품으려느냐. 산과 들, 꽃집에 계절마다 다 다른 빛깔과 역할이 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교양까지 얹은 이성적인 정의다.
공지 이메일 시절이 그립다.
내가 원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열어보고 답을 형편대로 하면 된다.
단체 카톡방은 동시다발로 쏜다. “카톡” 소리와 함께 창이 열린다. 누가 조직의 임원이 되었다. 누가 어디 강연을 맡았다. 누가 이름 있는 큰 상을 받았다, 어느 댁 자녀가 결혼을 한다, 한 결 같이 자랑스러운 소식이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 이런 고얀 말이 있나? 그럼 거꾸로 “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 꼭 행과 불행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아, 나는 다행이다. 그 상황이 아니라서 한시름 놓았다는 안도의 표현이다. 평정심을 지키려 해도 너그러운 관음보살의 미소를 머금을 수가 없다.
그릇이 옹색하다.
담지도 쏟아내지도 못하면서 가슴 한쪽이 후끈 달아올랐다가 싸하게 가라앉는다.
과호흡 증후군이다. 일어서서 서성인다. 치졸한 이 역풍을 어떻게 다스릴까. 너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잖아. 너 그동안 게으르지 않았잖아. 쓰담쓰담 토닥토닥 셀프위로다. 너는 “군자가 되고 싶다”며? 알고 보니 소인이네. 귀로 듣는 것이 순한, 이순耳順의 나이잖아. 오늘 본 것은 허상이야, 착시라고. 왜? 정말 봤는데. 네가 보고 싶은 대로 봤잖아. 순하게 새겨보고 순하게 새겨들으라고. 너 기쁠 때 축하 가장 많이 받았지? 그랬었지.
너는 이런 말 잘 하더라.
“축하는 1등으로” “위로는 꼴등으로” 소식이 창에 뜨자마자, 나는 네가 잘 되기를 아침저녁으로 기도했다는 듯이 1등으로 축사하라. 미적거리면 오해를 부른다. 그 사람이 춤추다가 다리가 부러졌거나, 무엇을 쌌거나 벽에 발랐거나, 이혼을 했거나 사별을 했을 때, 너의 불운을 내가 놓칠 새라 쳐들어오면 너는 좋겠니.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 뻔히 알면서 신문이나 방송에도 나지 않은 일을 기다린 듯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니. 나도 마음이 아프다” 그래, 정말 아프다면 그가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위로가 아닐까.
별아 별 생각으로 이리 재고 저리 재다가 들어가 보면,
나보다 손 빠르고 생각 빠른 이들이 줄줄이 기발하고 새로운 이모티콘까지 곁들여 축하 메시지를 남겼다.
답 글의 속도가 인성의 잣대처럼 보인다. ‘아하~, 또 놓쳤다.’ 마지못해 흔적을 남기게 되는 꼴이라니. 너와 나는 그냥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사교성 멘트. 이런 공청회 같은 카톡방 기술은 도대체 누가 창안하였을까. 청문회장에 몰래카메라가 돌고 있는 느낌이다. 어느 단체 집행부는 피치 못해 참가하지 못하는 사연을 동영상으로 올리란다. 가혹한 포토라인이다. 공적인 공감을 공유하자는 뜻으로 초대되었겠으나 나는 아직 숨 쉬고 있는데… 언뜻, ‘공개처형’이라는 자막처럼 보인다. 내가 너무 비약했나. 슬며시 손 한 번 잡고, 슬며시 따뜻한 국밥 한 사발 함께하는 축하와 위로가 갈수록 귀하다. 세상은 관중이 필요하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이다.
영국이 부럽다.
유럽연합에서 나갔다. 유로를 쓰지 않고 파운드를 쓴다. 역시 대영제국이다.
시도 때도 없이 SNS로 날아오는 우스갯소리, 세태의 의정활동, 동영상 등을 본다. 코드끼리, 라인끼리, 人라인끼리 돈독하다. 누가, 누가 더 큰가? 코끼리와 코끼리가 싸우다가 코가 부러진 끼리끼리 문화다. 그렇다고 단체 카톡방에서 ‘나가기’버튼을 누를 용기가 내겐 없다. 나는 파운드의 가치에 버금가는 ‘인격’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소요유’를 누리고 싶다. 카톡방에서 다 함께 따뜻할까. 내가 원하는 것이 과연 가상공간 안의 체온일까.
몇 년 동안 내 주변 환경이 온통 우환이다.
소통할 겨를이 없다. 나는 전화를 먼저 걸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그나마 단체 카톡방 말고는 문자나 전화해주는 사람도 드물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주도권을 상대에게 맡겨두는 것’이라는 말이 딱 맞다. 똬리 틀어 몸을 사리는 냉혈인간에게 누가 다가올까.
연예인 게이트도 아니건만, 무시로 날아온다.
모르쇠도 편안하지 않다. 그뿐인가. 즉시 답을 하라고 실명으로 출석까지 부른다. 그래도 차마 ‘나가기’버튼은 누르지 못한다. ‘신독愼獨’을 화두로 삼고 독락당을 꿈꾸던 나는, 지금 ‘4721’ 독방수감 중이다.
《에세이 21》 2019-겨울호
류창희
수필집 : 메타수필『타타타 메타』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논어에세이 『빈빈』 『매실의 초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