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논어> 타타타, 메타

기도하는 마음으로

류창희 2019. 12. 27. 15:05

기도하는 마음으로

- 구지도구의丘之禱久矣

 

 

 

사람이 우선이다.

공자는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했다. 유학은 본래 현실적이고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인본주의다. 왜곡된 유교적 관습이 세대 간을 불편하게 한다면 조상이 무슨 소용인가. 살아생전 잘 모시면 된다.

 

 

공자께서 병이 심하여 위중하자 자로가 신에게 기도를 드리자고 했다. 이에 공자께서 “그런 이치가 있는가?” 하고 묻자, 자로가 대답하기를 “있습니다. 뇌문에 ‘너를 천신과 지신에게 기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였다. 공자 가라사대. 그렇다면 “나는 기도한 지가 오래이다.” 하셨다.

子疾病이어시늘 子路請禱ᄒᆞᆫ대 子曰有諸아 子路對曰 有之ᄒᆞ니 誄예 曰禱爾于上下神祇라ᄒᆞ도소이다 子曰丘之禱久矣니라 - 述而

 

 

신 앞에 인간은 나약하다.

신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 잡아주는 따뜻한 손일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고 선으로 옮겨가는 마음이 기도가 아닐까. 공자께서 나는 기도한 지가 오래다.”는 말은 날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생활했기에 일부러 따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다.

 

예기병이 위독하면 오사五祀의 신에게 기도한다.”고 하였다.

이는 절박한 정에서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이다. 기도할 당초에 병자에게 전한 뒤에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오사는 대성전이나 대웅전 대성당처럼 크고 번듯한 곳이 아니다. 그 집안의 대문 방문 뜰 부엌과 중류 즉, 채광구멍이나 낙숫물 떨어지는 곳까지 소홀하지 않게 다독이는 것이니 일상의 거처가 다 신전이다.

 

친정엄마도 시어머님도 절에 다니셨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나는 초하루, 보름, 또는 달마다 지장재일, 관음재일, 해마다 정초기도나 사월초파일까지 어머님을 모시고 쫓아다녔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나를 보면 좋아한다.

눈 꼬리가 쳐져 순종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푼수처럼 잘 웃고 명랑한 분위기로 남을 즐겁게 한다.’고들 말한다. 나를 전도하던 어느 지인은 귀담아듣지 않는 내가 얄미웠던지, 네가 아직 사는데 쓴맛을 보지 않았다.”며 그동안의 나의 삶까지 간을 봤다. 지나친 겸손으로 너는 신에 대해 너무 교만하다.” 라며 우정에 선을 그었다. 정령, 그럴까? 사경을 헤매며 힘들 때만 죄의식을 느낀다. 그러다 또 살만하면 절대자의 노여움을 까마득하게 잊고 날마다 용량초과의 에너지로 돌진한다. 어쩌면 나는 삶에 대해 정말 교만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본래 남의 시선이 나의 거울일 때가 있다. 내 뒤태가 어떤 모습인지 자신은 모른다. 여태까지 거울 앞에 보이는 얼굴만 보며 살았다.

 

달마다 계주 릴레이 하듯 우환이 바통터치를 한다.

지난해에 아들이 두바이를 다녀와서 격리 치료를 받았다. 갓난쟁이 손자가 난데없이 장이 꼬였다. 더 왕성하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할 거라며 명예 퇴직한 남편이 의기충천하더니 전기 톱날이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낮에도 커튼을 치고 밤에 암막을 쳐도 쪽잠이 어둠을 깨운다. 이럴 때 소심한 나는 내 탓이다.’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몽땅 끌어안고 버둥거린다. 나는 날마다 성실하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시름이 깊다.

늘 가족이 잘되기를 바랐었는데, “내 기도가 부족했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기도하지 않았다. 막연히 잘 되겠지.’라며 요행을 바랐던 것 같다. 모든 곳에 신을 둘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는데, 나는 어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문득, ‘~ 지금 벌을 받고 있구나!’ 자책한다.

 

내가 도덕적으로 옳다고 만들어 놓은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비판의 잣대만 들이댔다.

어떤 특정한 단어들, 예를 들어 조강지처, 결혼, 행복, 건강, 겸손, 정의 등의 반대말만 들어도 매몰차게 부정하거나 경멸했다. 그들의 아픈 사연에 귀 기울여 공감하지 않았다. 누군들 정성스럽게 살고 싶지 않았을까. 누군들 시간이 남아 찬바람을 가르며 새벽에 기도하러 나갈까. ‘진인사대천명이라 했거늘, 그동안 사람의 도리는 다하지 않고 무슨 배짱으로 그리도 당당했었는지.

 

공자님의 친구 원양이 오만하게 걸터앉았는데, 공자께서 어려서도 예의가 없었으며 장성해서도 겸손하거나 칭찬할 만한 일이 없었으며, 늙어서도 죽지를 아니하니老而不死, 너는 세월을 도적질하는 것이라며 지팡이로 그의 정강이를 때렸다.

 

이제야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읽으려 한다.

내 모습이 평생 잘한 것 없이 인륜만 무너뜨린 원양의 꼴이다. 정강이를 맞을 정도면 그래도 낫다. 오체투지로도 모자란다. 나이 들어서도 내가 행하는 일이 옳다며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감히 누굴 위하여 기도하겠는가. 촛불을 밝혀 기도하는 일은 그래도 명분이 크다. 비록 화분에 초롱꽃 한 포기를 심어 기도하더라도 오롯이 우매한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 신과 만나는 재계의 순간은 간절하다. 날마다 정화수 한 사발을 장독대에 올리시던 어머니처럼 어미답게 살아야 한다. “기도하는 사랑의 손길로 ~~ ~, 그런데 나는 왜 이다지도 일상의 기도가 어려울까.

 

 

 

* 류창희 : 메타논어, 타타타 메타.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논어에세이 빈빈.  매실의 초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