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내 곁에
내 사랑 내 곁에
-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
“넌 요즘 어떻게 지내니?” 아무도 묻지 않는다.
나는 겨울 석 달 동안 낮에 나가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모자를 눌러쓰고 울타리 쳐놓은 빈터를 찾아가 다섯 바퀴씩 돌고 왔다. 내가 일을 놓은 것도 내 짝지가 하던 일을 놓은 것도 아무도 모른다. 또 그 일이라는 것이 당장 먹고사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스스로 터널 안에 있다.
개강을 앞두고 동네 미장원에 갔다.
머리를 커트하고 있는데, TV에서 어느 개그맨이 나와 말한다. 몹시 힘들던 시절에 최악의 나쁜 행동을 하기 직전, 누구에겐가 전화 한 통을 했다. 상대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내 전화를 받아주겠나… ?' 반신반의하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그래, ㅇㅇ아! 네 얘기 듣고 싶었어.” 그의 집 근처에서 만나 밤새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일어서며 “ㅇㅇ형, 나 열심히 살 거야!” 묻지도 않은 약속을 했다. 유재석은 지갑을 통째로 주며 “택시 타고 가라!” 했다고 한다. 미용사 몰래 나는 속울음을 삼켰다. 나도 누군가와 마주 앉아 "그래, 네 얘기 듣고 싶었어!" 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오늘도 또 내 근황 이야기에만 바빴다. 국민 MC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해 겨울, 나는 거의 내 키만 한 배낭을 짊어지고 인도印度를 걷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면서도 역에서 길거리에서 배낭을 끌어안고 쪽잠을 잤다. 그들이 내 짐 따위를 훔쳐다가 무슨 큰 영화를 누릴 거라고, 기껏해야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끼 못 사고 인색하게 굴며 싸들고 간 잡동사니들이다. 어디 짐뿐인가.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강의가 들어오든 말든, 세상이 무너질 것도 아닌데…. 걱정을 껴안고 살았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남편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말한다.
“조성민이 자살했대.”
“누구?” “최진실 남편, 조성민!” 몇 년 전 수업시간 중에 누가 최진실이 죽었다고 했다. “왜?” 그때는 충격이 컸었다.
그런데 조성민의 죽음에는 충격보다 마음이 아픈 건, 꼭 아이들 아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무엇이 그를 죽을 만큼 힘들게 했을까. ‘베르테르 효과’라는 것이 있다. 최진실 한 명이 죽었는데 그 해에 ‘따라쟁이’ 1천 명이 저 세상으로 따라갔다고 한다. 우상으로 여기던 사람의 자살이 무서운 이유다. ‘자살을 밥 먹듯이, 자살을 내 똥 누듯’ 정신적인 황폐가 생명경시 풍조를 만들었다. 그날, 이런 생각을 했다. 혹시, 사흘 전에 인도에 도착했더라면, 짐 풀고 적응하느라 생존 본능의 끄트머리라도 붙잡지 않았을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 정신없이 시끄러운 릭샤의 빵빵거림과 뿌자 의식 속에서 마음의 고요를 찾지 않았을까. 옴마니반메움을 읊조리며 사체를 태우는 갠지스 강가에서 빵 한 조각과 짜이 한 잔으로 소소한 행복이 차오르지 않았을까. 그때 나는 바라나시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숭고했다.
매스컴은 사망원인을 찾지만, 누구 때문도 무엇 때문도 아니다.
다만 ‘극기克己’를 못했다. 충동적이고 감성적인 자아에 미혹 당했다. 자신이 스스로 업신여긴 다음에 다른 사람이 업신여기는 것이며, 자신이 스스로 무너진 다음에 다른 사람이 무너뜨리는 것이다. 내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도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고, 내가 나를 버리면 다른 사람도 나를 버린다.
자장이 덕을 높이고 미혹을 분별하는 일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말했다. “충성과 신의를 중하게 여기고, 도의를 실천하는 것이 곧 덕을 높이는 일이다. 사랑할 때는 그 살기를 바라고, 미워할 때는 그 죽기를 바라는 것이 이것이 미혹이다.”
子張이 問崇德辨惑ᄒᆞᆫ대 子曰, 主忠信ᄒᆞ며 徙義 崇德也니라 愛之란 欲其生ᄒᆞ고 惡之란 欲其死ᄒᆞᆫᄂᆞ니 旣欲其生이오 又欲其死 是惑也니라 - 顔淵
사랑과 미움으로 현혹되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생사는 천명이다.’ 그런데 자신의 감정 잣대로 생사를 결정하려고 한다. 사랑 덕분에 살만하고, 미움 때문에 못 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사회 인사나 기업인이 법정조사를 받던 중 억울해서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공직자 윤리를 지켜야 할 전직대통령도 부엉이바위에 오르고 현직 총리도 목숨을 내놓겠다며 국민을 위협한다. 이유는 단 하나 결백을 보여주겠다는 완강한 의지다. 예전에는 “쯧쯧” 혀를 차며 ‘오죽하면…’, 측은지심을 발휘하면 상황이 끝났다. 지금은 어떤가?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설마~?” 하면서도 온갖 누명을 다 덮어씌운다. 억울할수록 살아서 증명할 일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자신을 버릴 수가 있는가.
자살할 용기를 거꾸로 바꾸면 ‘살자’가 되듯 내 힘이 ‘힘내’다. 가끔은 견딜 수 없지만, 내 힘들다를 거꾸로 바꿔 ‘다들 힘내’로 희망차게 살아간다. 내가 나를 지키는 <내 사랑, 내 곁에>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린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비틀거린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나만 죽는 것이 아니다. 부모도 이웃도 사회도 병들게 한다. 죽을 만큼 절박하게 아파보지 않은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감정의 사치일 수 있다.
새댁시절, 새우튀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튀김옷을 입히지 않고 끓는 기름에 새우만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시어머님께서 “정신머리를 어디다 빼놓았느냐”고 불호령을 하셨다. 순간, 나는 몹시 두려웠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방 안에 들어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시외전화로 외할머니 부음을 듣던 날이다. ‘외할머니께서는 왜, 농약을 마셨을까?’ 외할머니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손자의 뿌리가 할아버지라면 손녀의 정체성은 외할머니다.
* 류창희 : 메타논어, 타타타 메타.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논어에세이 빈빈. 매실의 초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