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
이력서
- 사십견오四十見惡
“오우~, 멋진데…”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국제적인 보잉사 사모님께서 네임카드를 목에 걸고 싶다고 한다. 전에는 이름표를 근무 책상 앞에 붙였다. 이제 관료주의 제복은 책임감이 무거워졌다. 아예, ‘꼼짝 마라’ 개목걸이처럼 옥죈다. 위아래로 이름표를 훑어보면 ‘너의 목줄은 내가 쥐고 있다.’는 엄포다.
요즘은 일하는 자체가 능력이다.
나는 얼굴과 엉덩이가 매우 방정하게 생겼다. 착실하게 앉아 책 읽는 모양새다. 오로지 외모가 나라 국〔國〕자처럼 네모반듯하여 길거리에서 캐스팅되었다. 꼭 국가의 기록이 담긴 서책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내가 꿈꾸던 일이다.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처럼 ‘라이브러리언librian’이다. 지역의 작은 도서관에서 맡은 소임을 다하고 마칠 무렵, 문화공간으로 관을 발전시킬 인재가 필요했다.
일을 같이 해온 집행부 선생에게 넌지시 부탁했다.
기관장의 자격이 필요하니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이력서요?” 깜짝 놀란다. 결혼하고 아이 둘 낳은 것 밖에 한 일이 없는데, 뭘 써야 되느냐고 되묻는다. 처음에는 장난하는 줄 알았다. 정말, 한 번도 써 본적이 없다고 한다. “아니, 어떻게 이력서 한 번을 안 써보고 살았어요?” “정말?” 정말,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취임식 때 그의 이력을 보니, 현직대통령 영부인이 나온 명문 여자대학 출신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나라 재원才媛들이 이력서 한 장을 써보지 않고 가정에서 아이들만 키웠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선진국으로 도약함은 당연한 일이다. “아, 아~ 대한민국. 아, 아~ 나의 조국♬”이다.
‘그대는, 이력서를 써 본적이 있는가?’
요 몇 년 사이, 초 중 고등학교가 얼기설기 겹쳐지는 친구들을 만난다. 30년 넘은 공백에 서울 달동네출신 여섯 명이다. 저녁에 와인 한잔씩 따라놓고 “얘들아, 내 말 좀 들어 봐” 이력서 한 번 써보지 않고 평생을 산 사람이 있더라. “말이 되니?”라고 물었다. 그만큼 나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정말, 팔자 좋은 양반들이지.” 이력서 한 장에 팔자타령까지 부른다.
청소년기를 함께했던 내 친구들은 지금도 다 현역이다.
지난 날, 대기업재벌총수의 비서와 경리를 지냈던 경력도 결혼이라는 이름에 묻혔다. 그 시절, 아이나 노인을 볼보거나 모시는 일이 훗날 직장이 되리라고 어느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우리들은 ‘학벌’이라는 단어는 모르고 오로지 주산이나 부기 타자급수만이 최고인줄 알았었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으며 버텨온 세월의 보상인지 나와 친구들은 현재 유아원, 노인병동, 복지관, 도서관 등 생활전선에서 일하고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남도 휴가 날짜를 조절하느라 애를 먹는다. “세상, 참 웃기지 않니?” 사람들이 환갑 넘어 ’출근‘하는 것이 부럽단다. 서로 묻고 대답하며, “그래, 맞아” 자식에게도 남편에게도 “당당하긴 해.”라며 서로 위안이라는 안주를 씹는다.
‘그대는, 이력서를 써 본적이 있는가?’
나는 지금도 해마다 이력서를 쓴다. 고정적으로는 1년에 대여섯 장을 기관에 제출한다. 비정규직 시간 강사는 학기가 바뀔 때 마다 재계약 자료로 이력서를 낸다. 평생에 내가 가장 부지런히 하는 작업이다. 처음 이력서는 고3 여름방학에 자필로 썼다. 고작 고등학교 졸업예정자에게 학력이나 경력에 무엇을 썼을까? 가혹하다. 1956년, 경기도 포천출생, 1964년 정교분실 국민학교 입학, 1968년 미아국민학교 전학, 1969년 미아국민학교 졸업이다. 시시콜콜한 이력을 펜촉에 잉크를 콕콕 찍어 한 글자 한 글자 서각을 파듯 기록했다. 그 때와 다름없이 지금도 성실하게 손가락을 꼭꼭 눌러 자판을 찍는다.
오늘도 나는 다섯 군데 이력서를 제출했다.
‘일거리 창출’이라는 프로젝트다. 새로운 정부가 공공기간 채용비리를 바로 잡는단다. 학력, 경력, 해당분야 자격증과 해당분야 실적자료를 연도뿐만 아니라 월, 일까지 기재하여 사실증명서를 모두 첨부하란다. 일일이 원본을 가져가 원본대조 필에 사인도 한다. 나잇살이나 먹고서 담당자들 앞에서 돋보기를 끼고도 어릿어릿 겸연쩍다. 2차 면접의 질문에서는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이 참에 일을 놓아버려’ 순간, 순간 숨어들고 싶다. 그러나 절차에 따라 법을 잘 지키면 일자리를 준다는데, 이왕이면 따뜻한 밥을 먹고 싶다.
집에 돌아와 나는 지금 이중 이력서를 작성하는 중이다.
소장용이다. 소장용은 한 줄 한 줄 적을 때마다 차오르는 감흥이 모락모락 하다. 작품이력이다. 무엇이 다른가. 기관제출용은 출생년도부터 한 계단 한 계단 밟은 그야말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생존의 발자국이다. 문학 소장용은 꿈으로 오르는 사다리다. 첫머리는 언제나 올해 오늘이요, 맨 밑에 칸은 2001년 ‘에세이문학’ 겨울 완료추천이다.
평생에 행복지수가 가장 떨어지는 시기가 사십대라고 들었다.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다가 꿈을 포기하는 나이란다. 포기란, 불행이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나의 꿈은 바로 불혹의 나이에 시작됐다. 40세까지 다 버려도 아까울 것이 없다. 중간 중간 어느 해는 아무 실적이 없다. ‘나, 이렇게 멈춰있어도 되는 거야’ 어쩌면 나는 삶의 궤적을 남기기 위해 오늘도 문학의 허울로 글을 쓰는지 모른다.
공자, 가라사대 “나이 사십이 되어서도 미움을 받으면 그대로 끝나고 말 것이다.”
子曰 年四十而見惡이면 其終也已니라 - 陽貨
나이 사십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했던가.
주름이 유난히 많은 나는 잔주름 하나하나가 내 글의 행간, 나의 정체성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글 쓴 이력마저 다 버려야 할 것이다. 그때 또 어찌 할까. 노르망디 상륙작전 짜듯 D-day를 잡아야 한다. 오늘부터, 아니면 3년 후, 더 길게 십년 후는 어떨까. 또 미련이 동지섣달 움파 자라듯 웃자란다. 어제 내린 하얀 눈은 오늘 내 앞길을 질척하게 할 뿐, 뒤돌아보지 말자. 탕湯왕이 이르기를 ‘진실로 어느 날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나날이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오로지 새롭게, 새롭게 하라고 했다.
글이여, 나의 문학이력을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진화시키기를!
* 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大學章句 탕왕의 반명에 이르기를 ‘진실로 어느 날에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나날이 새롭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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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력>
메타 논어 『타타타, 메타』
예에서 노닐다 - 수필은 - 욕파불능 - 명품의 탄생 -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 그리움은 흰 바탕에 - 지나침 & 모자람 - 일장춘몽 - 기도하는 마음으로 - 내 사랑 내 곁에 - 감 & 동 - MINI - 아름다운 세상 - 여고 동창회 - 이력서 - 사달 - 연예인 병 - 어찌 숨길 수가 있는가 - 꼰대 - 사무사 - 좋은 동네 - 아는 것이 없다 - 달력 - 맹춘 - 성냥 - 법 & 밥 - 미인이거나 글을 잘 쓰거나 - 그놈이 그놈 - 답다 - 패턴, 0410 - 성정대로 - 위장전입 - 솔직하게 - 요산요수 -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다 - 전 삼일, 후 삼일 - 삼년은 너무 길다 - 밤나무를 심는 까닭 - 오캄 - 무늬만 며느리 - 일등 사윗감 - 불꽃, 지르다 - 쪽박 & 대박 - 궁팔십 달팔십 - 베풀지 마라 - 꿈틀 - 문양 - 타타타, 메타 - 살롱에서 클럽으로 - 통통통 - 악, 예에 깃들다 - 자 논어란? - 지상인터뷰 - 법고와 창신의 글쓰기 - 바람의 문장에 풀꽃을 심다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봄의 질주 - 욕파불능 - 해 질 녘 - 님에 대한 변 - 『규합총서』, 이 한 권의 책 - 절차탁마 - 몰입 - 그녀도 찔레꽃을 보고 있을까? - 수수깜부기 - 아뿔사! - 나는 럭셔리하다 - 엄마의 딸 - 그곳에 J가 있었다 - 나의 플라멩코 - 나는 괜찮다 - 낙엽들이 말하다 - 삼만원 - 돈의 무게 - 동지섣달 꽃 본 듯이 - 2박3일, 달콤하고 떫은맛 - U턴 - 선상문학 - 나도야, 선수 - 불꽃, 지르다 - 내사, 내 마음대로 한다카이 - 미끼 - 몽마르트르를 탐하다 - 명 클리닉 - MERS의 강 - 마담, 모르쇠 - 파리지앵, 이 남자 - 적자생존, 찍자생존 - 파리지엔느, 이 여자 - 어젯밤에 당신이 한 짓을 나는 안다 - 체크인 체크아웃 - 고흐의 환생 -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 야영장, 낯선 풍경 - Innisfree, 그곳 - 가파른 사랑 - 아버님의 안경 - 옷을 잘 입어야하는 이유 - 싸한 맛, 공부 - 잉여 - 자는 아이가 예쁘다 - 맹춘 - 어에 머물다 - 성냥 - 원 - 별을 품은 그대
논어 에세이 『빈빈』
고전의 향기 - 생색내다 - 호시절 - 으악새 슬피운다 - 꿈꾸는 크레송 - 손을 말하다 - 들키고 싶은 비밀 - 관솔 - 산골짝의 다람쥐 - 마지막 수업 - 우리 아버지가, 훔쳤어요 - 산앵도나무 꽃이여! - 머피 & 샐리 - 여자 & 남자 - 병기사불식자 - 화, 꽃차로 피워내다 - 지지 - 차라리, 막대 걸레를 잡겠다 - 아~, 아름다운 세상 - 감성, U턴하다 - 밥 먹는 것도 잊다 - 설령, 거친 밥을 먹더라도 - 꿈엔들 잊히리오 - 따뜻한 외로움 - 무화과 - 위산일궤 - 학운에 중독되다 - 문학을 하려거든 - 세시풍속 - 퇴계의 향기를 찾아서 - 북극성 - 아침 꽃 저녁에 줍다 - 병영 도서관 - 계례 - 치자꽃향기 코끝을 스치더니 - 상견례에서 ‘통과!’를 세 번 외친 사연 - 텐프로 - 빈빈 - 미친놈과 고집 센 놈 - 뜰에서 가르치다 - 오키나와에서 삿포로까지 - 가족사진 - 온독이장 - 제우담화문 - 문상객 - 옛날의 금잔디 - 아리랑 동동 - 그 뿐이라 - 원숭이 똥구멍 -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
『매실의 초례청』
빗금 - 길음동 골목 - 아버지의 방 - 이월매조 - 할머니의 축문 - 고전의 향기 - 문화 류씨 - 초사란 - 봄 뜰 - 매실의 초례청 - 그리움은 수묵처럼 번지고 - 4월의 빛깔 - 회색과 갈색의 눈길 - 불씨 - 우담화의 제문 - 추석빔 - 발한 - 화양연화 - 가화 - 술독 - 술이 고픈 날 - 아지매여, 꽃이 피었소 - 원숭이띠의 변 - 숨죽이어, 숨 쉬지 않는 것처럼 - 떠나보내기 - 쏜살 - 홀로 먹는 밥 - 한 삼태기의 흙 - 덩샤오핑 - 너도 풀꽃과 - 불평즉명 - 고리 - 바람은 감각이다 - 장마 전선 - 무기를 버리다 - 김 상병과 이 이병 - 민지 - 성인식 시연 - 풀꽃꽃병 - 운치는 나를 보고 초막을 지으라 하지만 - 각시회 - 속알머리 - 종파티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 솜꽃이고 싶다 - 감추어 두시겠습니까? - 댓돌위의 흰 고무신 - 여행을 떠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