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실의 초례청

쫑(終) 파티에서는 종(鐘)소리가 울렸다

류창희 2017. 2. 19. 10:57

쫑파티 날이다.

 

봄 학기 가을 학기 의례적인 행사다. 그러나 수강생들에겐 자못 진지하다. 옛날로 치자면, ‘책거리’라고 하여 책 모양으로 빚은 송편을 먹으며 한권의 과정이 끝남을 기렸지만, 굳이 ‘쫑파티’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시대적 감각을 따르자는 이름이다. 떡과 음료수를 준비해 놓고 후식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수업 마무리를 한다. 

 

나는 수강생들을 제법 나무라는 편이다. 항상 집에서 다음 주 배울 것을 공책에 써오게 하고, 배운 내용을 운전연수 하듯, 나이 수만큼 소리 내 읽어보라고 권한다. 숙제 때문에 놀 여가가 없이 “쎄가 빠진다.”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은근히 노트 자랑을 하시는 그 분들에게서 즐겁게 공부하는 법을 배운다.

 

수업시간에 눈이 마주치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웃는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귀뿌리부터 붉어지며 이내 얼굴 가득 꽃이 피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한 갈래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 가끔은 곱게 풀한 모시옷을 입고 왔다. 그런 날은 눈길이 더 갔다. 전체적인 매무새가 60년대 어머니들의 나들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정겨움으로 강의실이 환하게 밝았다.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남산을 찾던 날, 서울타워 맨 꼭대기 층에는 민들레, 질경이, 애기똥풀, 엉겅퀴 등, 우리 들꽃들이 액자 속에 걸려있었다. “얼레리야! 저거 포천에 가면 지천인데, 세상에 저걸 찍어다 걸어놓다니. 저건 쇠똥 밭에나 피는 꽃인데…” 라며 나지막이 별꼴이라고 하셨다. 

우리나라 금수강산에 지천으로 핀 들꽃들이 우리 모습과 닮지 않았던가. 튜립이나 장미꽃은 결코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거창한 행사 날 주인공을 빛나게 할 뿐이다.

 

한 학기 고전의 향기 시간, 종강 출석체크를 하고 있었다. 수강생들 중에 퇴직하신 선생님들은 무엇보다 수업태도가 좋으시다. 친정어머니와 딸이 함께 공부하는 모습은 여간 부럽지 않다. 더구나 결혼하여 각 집에 사는 삼 남매가 중년의 오빠와 함께 공부하는 모습은, 그 우애가 부럽다. 그중 부부가 나란히 앉아 한권의 교과서를 같이 보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내 가족을 보는 듯 푸근한 모습은 들꽃처럼 살고 있는 우리나라 주인공들이다.

 

그 사람들의 특징만큼이나 동기나 목적도 천차만별이다. 선생님과 공무원, 한자능력시험을 준비하는 대학생, 일본어나 중국어에 도전하는 주부들, 그냥 고전을 읽고 싶은 사람들. 서로 개인적 친분을 가져볼 기회가 없다가, 이렇게 종강 날이나 마주앉아 자기소개를 한다.

일일이 단어를 찾아오는 학구파, 무조건 출석만을 자랑으로 삼는 개근상파, 도서관 옆으로만 이사하는 맹모삼천(孟母三遷)파, 이들을 쭉 돌아가다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이00입니다.” 그녀의 느낌은 만지면 금방이라도 툭 터질 것만 같은 봉숭아 씨앗처럼 조심스러웠다고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정말 그녀에게선 꽃향기가 나는 듯 했다.

 

그녀는 딸이 대신 수강신청을 해 줬다며, 한 학기동안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분도 개근상파구나 짐작했다. “우리 아들 결혼식 날에도 왔었는 걸요”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 떠나갈듯 웃었다. 난 속으로 ‘먹고 살 일도 아닌데…, 참 별난 어미도 다 있지.’ 생각했다. 그럼 그마이나 키웠는데 에미 없다고 장가도 못가느냐며 결혼사진은 가서 찍었다고 당차게 말한다. 그러면서 “저는 학교에 다닌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처음으로 선생님이 제 이름을 불러주시는데 어떻게 결석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문을 잘 읽지도 못하고 제대로 따라 쓰지도 못하지만, 귀동냥이 더 재미있다며 집에 가면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은…” 하면서 자랑을 한다고 했다. 아직 부끄러워 한 번도 직접 소리 내어 ‘선생님’ 불러보지 못했다며 살픗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교실 안은 잠시 숨이 멎는 듯하더니, 이내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가슴에 번져오는 아릿하면서도 뜨거운 기운이 목젖을 타고 올라왔다. 온 몸이 다 화끈거린다. 들꽃을 피울 척박한 땅을 기름지게 할 에너지다.

 

난 집으로 돌아오면서, 발걸음 속도에 맞춰 자꾸 자꾸 눈물을 닦았다.

그 날 종(終)파티에서는 종(鐘)소리가 울렸다. 

“땡 땡 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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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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