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어조와 목소리 또는 문체
수필의 어조와 목소리 또는 문체
- 방민교수의 수필강의
모든 수필에는 작가의 목소리가 있다. 이것은 글에서 작가가 사용한 단어의 종류와 그 배열에서 특정한 사람의 어떤 태도를 표현한 것이다. 이 목소리에서 글의 어조를 감지할 수 있다. 수필의 화자와 실제 저자는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잘 알다시피 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주요 제재로 삼는다. 작품 안의 화자는 당연히 작가와 동일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많은 면에서 수필의 화자와 수필가와 동일한 것은 사실이나 그대로는 아니다. 그렇다 해도 시나 소설의 허구적 인물은 아니다. 시와 소설의 인물과 유사한 면이 많지만 다른 점 역시 적지 않다. 이럴 때는 심리학의 퍼스나(persona) 개념을 떠올려야 한다. 사람은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사는데, 자아의 다양한 면모는 바로 이 퍼스나에 투영된다고 한다. 동일인이지만 각자 접하는 사회적 역할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변신하고 변용한다. 허구상의 가공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동일인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당연히 화자와 작가는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여러 수필의 화자를 종합하면 작가로 수렴된다. 작품에서 다루는 제재에 따라 약간씩 다른 화자로 변신해야만 수필을 개성적으로 만들 수 있기에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수필마다 다른 선택을 한다. 엄정한 목소리고 있을 수 있고, 나긋나긋한 섬세한 목소리, 심술궂은 개구쟁이의 목소리, 지루하고 짜증나는 목소리, 열정적인 광기의 목소리 등등 제재와 주제에 따라서 여러 목소리를 선택하고 이것은 사용하는 단어와 그 문장 배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잘 쓰건 못 쓰건 수필에는 목소리가 드러나지만 원하는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선 수련이 필요하다. 이것은 전적으로 단어의 선택(조사)과 배열(통사)에 있다. 수필 독자도 각 편의 목소리의 특질과 형성 과정을 안다면 보다 충실한 독해가 가능하다. 이에 맞게 작가는 글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창조하려고 애써야 한다. 작가는 원하는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서 글의 여러 양상을 조정하고자 노력해야할 것이다.
어조와 목소리는 문체의 구체적 드러남이라 할 수 있다. 글을 소리 내어 읽을 때 실감하게 되는 문체의 실연(實演)이다. 낭독이나 이야기의 관점에서 살피면 그것은 어조이며 목소리이나, 문자의 관점에서 묵독과 안독(眼讀)의 차원에선 문체이다. 말과 문자의 차이에서 구별하게 되는 것으로 실상의 어조와 문체는 한 몸이고 다른 현상의 발현이다. 음성언어의 관점에서 볼 때는 어조이나 문자언어의 면에서 보면 문체라고 구별하는 셈이다.
수필의 문체는 글에서 작가가 선택한 조사(措辭, diction)와 통사(統辭, syntax)와 관련한 문제로 모든 것을 집적한 산물이며 그로부터 드러나는 효과이다. 다시 말하자면 수필 문장에서 선택한 단어의 종류와 문장 유형이 글의 형태에 작용하고 효과가 나타난다. 조사와 통사는 어조(tone)와 목소리(voice)를 형성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으며 이 중에서 통사는 한편 수필의 산문리듬을 조성하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작가에 따라 서사 수필을 쓰면서 풍성한 세부 묘사와 은유를 사용하면 그 효과는 다양하면서 감각적이다. 또는 수필의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개념을 정의하고 확실한 실제의 사례를 보충하면 고도의 지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문체와 그러한 문체를 선택한 결과이다.
문체의 요소를 조정할 수 있는 작가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단어를 함께 배열하는 어떠한 방식에도 일종의 문체가 드러날 것이다. 그 결과가 완숙했건 미숙했든, 인상적이건 지루하든, 생생하건 둔감하든 관계없이 문체를 조정하는 기교, 즉 단어 선택(조사 문제)과 신중한 단어 배열(통사 문제)은 어조와 목소리를 만들어내고, 정확한 자리에 놓여서 목적한 바를 손쉽게 달성하거나 산문 리듬과 생동감에 전반적으로 매우 적합하다.
문체는 교묘해서 쉽게 통달하긴 어렵다. 그래도 여러 작가의 글을 많이 읽어 각각 문체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구별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때, 글을 쓰면서 문체적 관점으로 살피게 될 것이다.
[출처] 수필의 어조와 목소리 또는 문체|작성자 방민
예문 7
한동안 ‘진달래’ 시리즈 우스갯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진짜 달래면 주나?” 언감생심, 이 글을 쓰는 나는 좀 까칠하답니다. 염색을 거부하는 흰머리 소녀죠. 경고하건대 점잖은 선비는 흰달래를 넘보지 않습니다.
청첩장들 받아보셨죠. 여자들은 봄에 시집을 간답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음력 3월 3일, 삼월 삼짇날은 음기(陰氣)가 깊은 계절입니다. 봄바람이 겨우내 껴입었던 여인네의 속곳을 벗기게 되는데요. 연분홍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나물을 뜯으러 갑니다. 이름 하여 ‘화전(花煎)놀이’입니다. 찹쌀을 동그랗게 빚어 진달래꽃 한 송이씩 얹어 번철에 지져내는 꽃전입니다. 꼬맹이 소꿉동무들이 캐는 달래 냉이 씀바귀 정도의 들나물을 캐는 수준이 아니랍니다.
화전놀이 가는 아녀자들의 자태가 곱습니다. 아지랑이 아롱아롱 피어오르는 산등성을 오르노라면 마른나무 가지 사이로 다문다문 핀 진달래꽃이 환하죠. 자세히 눈여겨 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꽃잎 빛깔이 제각각 다르답니다. 흰달래, 연달래, 진달래, 난달래, 안달래 빛깔이죠. 진달래꽃은 홑겹 명주 치마보다도 실루엣이 얇습니다. 일명 두견화(杜鵑花)라고도 하는데 꽃술에서 들리는 두견새 울음소리가 애절한 규방가사입니다.
선녀들이 있는 곳을 나무꾼들이 훔쳐봅니다. 휘파람소리 들리시나요? “에구머니! 남세스러워라.” 과수댁이 놀란 듯 벌떡 일어나 훠이훠이 쫓아내는 시늉을 하며 앞장섭니다. 치맛바람에 제비쑥·원추리·참취·잔대와 홑잎이 뾰족뾰족 솟아오릅니다. 봄처녀는 짐짓 나물 캐어 담는 다래끼를 떨어뜨립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청년이 다래끼를 집어 들고 냅다 뛰어가며 “나, 잡아봐라~!” 숨바꼭질을 합니다. 어디 압구정동에만 로데오 거리가 있나요. 신사동 가로수 길에만 ‘야타족’이 있나요. 흐드러지게 핀 꽃뿐이던가요. 덤불 속에 찔레순까지 손짓하며 부릅니다. 산과 들, 천하가 온통 요조숙녀 군자호구(窈窕淑女 君子好逑)입니다.
잠깐! 여기서 꽃 빛깔은 여성의 치마 빛깔이 아니랍니다. 젖가슴의 유두(乳頭) 빛깔입니다. 예로부터 유선이 봉곳하지도 않은 생리 이전의 흰달래 어린 소녀를 범하면 동산에 난데없이 하얀 진달래가 피었다고 합니다. 나라에 변고가 생겼다고 한탄을 하였다지요. 요즘 연분홍빛의 연달래 아가씨들은 혼기가 넘어도 아이와 남편, 고부와 장서의 갈등에 지레 겁을 내어 결혼을 꿈꾸지 않아 걱정이라죠. 활짝 핀 농염한 진분홍빛의 진달래 마님들은 자체만으로도 으뜸인데, 보톡스 문신 피부박피로 청담동 사모님 풍을 꿈꾸고, 멍석 위에 널어놓은 푸르스름한 팥알 빛깔의 난달래 대비마마님들의 다이어트와 건강식품도 날개를 단 듯 팔린다고 합니다. 세상은 이제 된장에 호박잎 쌈만의 자연 맛이 아니랍니다. 얼굴만 보고 여자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벅머리 청년도 여인의 뒤태만 보고 쫓아왔다가 “안달래”라며 손사래로 내칩니다.(류창희, <여자&남자> 일부, 《논어에세이 빈빈》, 선우미디어,2014, 68-70면.)
이 글은 “~습니다”의 경어체 말투지만 오히려 야유성 비판적 거리를 얻는다. 관음적(觀淫的 )시선을 드러내며 타자화 된 전달자의 목소리에는 시치미 떼기의 어조가 담긴다. 작가는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풍자적인 관점에서 들려오는 세상사의 소문을 전하는 듯 능청스럽기만 하다. 자연과 인생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곳에 화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멀리 떨어져 지켜보는 완전한 타자의 시선이다. 야유조의 목소리면서 의외로 차분한 어조는 작가의 의미 전달에 제격이다. 사회적으로 다소 무거운 주제인데도 이러한 어조의 선택으로 희화시켜 독자가 거부감 없이 동조하게 한다. 주제와 어조의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결합이 성공적으로 보인다.
[출처] 수필의 어조와 목소리 또는 문체|작성자 방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