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
화양연화(花樣年華)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
아침마다 창호지문으로 스며드는 햇살. 아무도 보는 이 없고, 알아주는 이 없어도 눈물을 질금거린다. 서양 어느 나라에서는 이런 날을 위하여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한다고 들었다. 진혼미사를 드리듯 엄숙하게 시작해 파계승처럼 깨져 자신만의 ‘제2의 성’을 시작한다고 한다.
그럴듯한 말에 솔깃하여 검정드레스를 마련했다. 같이 축배를 들 이들만 있으면 된다. 하객들이 다 동갑이라면 더 의미가 있겠으나 숫자가 뭐 그리 중요한가. 뜻을 같이할 수 있는 벗들이면 좋다.
나이 서른에 오십을 꿈꿨었다. 그 나이쯤 되면, 되면…, 어느 일에서건 자유로워질 것만 같은 예감, 예감에 찬 숲 그늘이었다. 그런 날을 위해 양손에 시장바구니를 들고 힘차게 하루를 사 날랐으며, 때 묻은 마루를 힘껏 문질렀다. 차 마시는 이웃들과의 사교시간까지 아껴가며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고 생활의 조각들을 마음의 곳간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이젠 내가 여기 있었다고 내 목소리를 내고 싶다.
평생소원이 보리개떡이라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꿈도 가난한 모양이다. 전처럼 나는 다시 먹을 갈고 싶었다. 이젠 묵객(墨客)의 생활을 누릴 때다. 먹을 갈 만큼 주부생활에서 자유롭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숙제처럼 가사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설거지를 안 하고 자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이불을 안개고 외출하면 천장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지는 줄 알았었는데, 밤새도록 하루 온종일 설거지도 이불도 아무도 손을 안댔다. 어차피 내가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먼저하고 마음 내킬 때 집안일을 해도 집안이 탈 없이 잘 돌아간다. 오히려 내가 가족들에게 애면글면 잔소리를 하지 않으니 더 평화롭다.
또, 아내역할에서 자유롭다. 딸기밭에 가지 않아도 달마다 딸기물이 들던 시절, 남편을 얼마나 밀어냈었던가. 이제는 눈치 안 받고도 자연스레 각자의 방에서 잘 수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반란의 자유. 객기라도 좋다. 내가 입술을 앵두빛깔을 칠 한들, 머리를 타래 란의 모양으로 비비 틀어 굽실거리게 한들, 가슴을 박꽃만큼 활짝 드러낸들 제2의 성으로 성(姓)이 다른 자식을 더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 나이를 만약 꽃에 비유한다면, 손쉽게 딸 수 없고 꺾을 수도 없지만 그냥 멀찌감치 바라만 봐도 좋은 꽃. 한자리에서 세파를 몸소 겪고 저 높은 곳에서 조롱조롱 보라 빛 레이스를 펼치는 오월의 오동꽃이라면 좋겠다.
확대경을 들이대고 가까운 사람을 참견하기보다는 심안으로 보자. 생리 이전의 주름치마 펄럭이며 옥양목 블라우스를 입던 소녀시절로 돌아가자. 철이 좀 없으면 어떤가.
까만 분꽃 씨를 손톱으로 쪼개어 분을 바르고 울타리 밑 봉숭아꽃을 손톱 위에 얹는 멋이 좋다. 깊고 진한 맛이 산만큼 우러나오는 관능마저도 그윽하고 아름다운 지천명의 나이.
나는 요즘 물결이 잔잔하다. 호수같이 깊은 두 눈자위에는 아직까지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건만, 봇물 터지듯 쏟아낼 아픔도 슬픔도 무거운지 가라앉아있다. 그래서인지 생활이 단조롭다. 펄떡펄떡 뛰어야 할 힘찬 맥박이 숨도 안 쉬는 듯 가늘고 평화롭다. 이러다 끝내 열정적인 삶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지레 안주하는 것은 아닌지.
이래 좋고 저래 좋고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니, 나는 지금 어설픈 인생의 유미주의(唯美主義)에 빠져들고 있다.
그윽한 햇살아래 다시 역광을 꿈꾼다.
<<매실의 초례청 >> 2008
류창희
http://rchess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