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한(發汗)
방학 동안은 오로지 나만 위해서 쉴 것 같았는데 어쭙잖은 병치레로 시간을 다 보냈다. 병들기 전에 미리 예방하고 조금 아픈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병원에 가보지 싶어도 그게 잘 안 된다. 참고 참다 앓을 만큼 앓고 나서야 병원에 간다. 의사가 미련하게 아플 것 다 아프고 뭐 하러 왔느냐고 나무라면 난 마무리하러 왔다고 능청을 떤다. 서둘러 가봤자 긴급하게 째고 꿰맬 것이 없는 상황을 내가 먼저 알기 때문이다. 염치 좋게 퍼져 누울만한 배짱이 못되기에, 임시방편으로 끈 하나 걸어 적을 두듯 비겁하게 질병에 안주하고 있다.
나만 보는 탁상용 달력이 있다. 한 달 단위로 새로운 표어를 정해 써놓는다. 잘 지켜졌나를 확인 한 적은 없다. 수많은 단어들이 달마다 적혔다.
‘내 마음과 같이’ ‘선택한 가난’ ‘어두운 밤하늘에 드문드문 빛나는 별처럼’이라고 적어놓은 글들은 주로 나를 단속하는 내용들이다. 화가 목젖까지 차오를 때, 많이 갖지 못해 안달이 날 때, 적게 말하고 싶을 때의 문구들이다.
나는 비교적 차분한 편이다. 덤벙대지 않는다. 누구의 말꼬리를 잡아 총알같이 쏘아붙이거나 소리 지르지 않는다. 다급한 일이 있어도 숨 고름 몇 번하고 나면 오히려 목소리가 가라앉으며 말이 느려진다. 그래서 누구든 나하고 맞대놓고 싸우고 싶은 사람은 상대가 안 된다.
본래 타고난 성격보다는 환경 탓으로 돌린다. 내 어머니는 남편을 외지에 내 보내고 층층시하 어른들을 모시고 살았다. 집성촌 풍습이 그러하듯 안팎이 조심할 것 투성이. 그 속에서 남편이 보고 싶어도 맏며느리라는 이름으로 내색도 못 하고 나날을 삭히며 살았다. 나는 색동저고리를 입던 열 살 이전부터 어머니의 마음을 맞추며 살았다. 나마져 돌아누우면 어머니도 떠날 것만 같아 겁이 났다.
그 무슨 소리를 들어도 못 들은 채 못 본 채 하는 나를 어른들은 ‘속 깊은 아이’라고 했다. 그릇은 용량이 있다. 작은 키, 가벼운 몸무게. 그 구곡간장(九曲肝腸)이 깊어본들 얼마나 깊을 것인가. 넘치는 양을 주워 담느라 쩔쩔매는 꼴을 부지런히 노력하는 좋은 모습으로 한술 더 떴다.
그러니 어디다 대고 엄살을 떨고 하소연을 할 수 있었겠는가. 시멘트 담 밑에서도 뿌리만 내리면 방긋 웃는 노란 민들레꽃처럼 활짝 필수밖에. 혼자 있을 때 지치고 늘어져 끙끙 대다가도 마주앉은 한 사람만 있으면 다시 거뜬해진다. 그래서 남이 보는 내 삶은 늘 명랑하고 쾌활하다.
결혼하고 십년 세월 쯤, 시어머님은 “너라고 화나는 일이 왜 없을까. 참으면 병 된다. 넌 속도 없니? 네가 고맙기도 하지만 난 네가 무섭다.”고 하셨다. 잘 참는 것만이 미덕인줄 알았던 나는 졸지에 무서운 며느리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 둘을 낳으면서도 “아야” 소리 한번을 안 냈다. 하루 종일 종종걸음 치다 야단을 맞고 땅이 꺼질듯 서러워도 아침이 되면 다시 생글거렸으니.
그 시절 무엇이 그리 좋았을까.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그야말로 속이라고는 없는 년이었다. 누가 알까. 그 당시 한 달에 한 두 번씩 집에 오던 남편도 모른다. 혹 밤하늘의 별들은 들었을까. 밤마다 내 방에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가슴을 눌러가며 우는 속울음소리를.
난 발산해야한다. 자신을 누르며 자신의 마음을 안으로 숨기며 외부와 타협할게 아니라, 싫은 것을 싫다고 하고 힘든 것을 힘들다고 말해야한다. 무엇보다 약발 받고 길길이 뛰고 화를 내야한다. 소리 지르고 욕하고 삿대질을 하며 잡아당기고 밀고 때리고 싸워야한다. 내 감정에 솔직해져야한다. 그 짓을 대 놓고 못하니 이곳저곳이 탈이나 릴레이경주처럼 병명을 바꿔가며 몸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배꼽 위의 관념들이 그동안 나를 얼마나 품위 있게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좁은 소견머리로 궁리를 하느라 두통을 앓고, 가슴에 묻어 삭히고 발효시키느라고 썩어 문드러지게 한 비위도 구곡간장도 이젠 지쳤다. 머리는 맑게, 심장의 박동은 힘차게 되돌려 놓아야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알약도 가루약도 주사도 아니다. 보약이 있다면 나의 몸뚱이를 지탱하고 있는 발이다. 그 발로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땀을 흘리는 일이다.
나의 달력에는 한동안 ‘화양연화(花樣年華)’라고 적을 것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리라.
<<매실의 초례청 >> 2008
류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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