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희 2017. 2. 20. 12:35

잉여

 

<남자 사람>

 

 

그의 샤워하는 소리에 나는 설렌다. 그러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다. 평상심을 찾고 티브이 앞에 앉는다.

 

샤워 물소리보다 더 크게 티브이 볼륨을 높인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그가 힐끗 나를 쳐다보다 문간방으로 들어간다. 개념 없는 아내 행동에 비난의 눈길로 기선제압을 하는 중이다. 이 방송 저 방송 종편방송까지 몇 바퀴를 다 돌려도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 오늘도 허탕이다.

 

밤에 여자가 샤워하면 남자는 무섭다는데, 나는 남편이 낮에 샤워하면 만리장성을 쌓는다. 그가 외출하면 책도 읽고, 써놓은 글도 퇴고하고, 인터넷 내 사이트에 새 그림도 걸고 싶다. 그러나 소소한 몇 개의 그림마저도 여지없이 뭉개진다.

 

봄부터 그랬다. 여름 가고, 가을 가고 김장배추를 절여놓았다. 그가 또 샤워한다. 방에서 전화하는 목소리가 활기차다. 다시 설렌다. 드디어 외출하려나 보다. 오늘은 성공이다. “친구 만나고 올게.” 나는 나가는 뒷모습에 대고 일부러 안 해도 될 말을 한다. “친구에게 점심도 사주고, 저녁에 김장할거니 5시 이후에는 꼭 들어오시라.” 그가 없어도 김장 따위는 잘한다. 낮 시간을 벌고 싶은 거다. 여유를 누리자니 기쁜 에너지로 때 이르게 배가 고프다. 냉동실에서 삼겹살을 꺼내 두 점을 삶아 배추쌈으로 허기를 달랬다. 글 한 편 읽기도 어중간한 시간, 커피 한 잔을 들고 다시 티브이 앞에 앉았다.

 

띡띡띡띡띡~ 띠리릭~” 자동으로 현관문이 열린다. 그가 불쑥 들어선다. 외출한 지 두 시간도 안 된 점심시간이다. “점심은?” 하고 묻는데 의지와는 달리 부아가 치민다. “내가 바하야?” 200밀리 우유 타서 시간 맞춰주면 꼴깍 다 먹고 등 두드려주면 트림하는 손자냐는 뜻이다. 어딜 바하에다 비교를 하는가. 바하는 도리도리, 짝짝꿍, 으싸으싸구령 넣으면 귀엽게 재롱이라도 한바탕 선사하지, 꼴깍 말끝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멀쩡한 정년을 5년이나 앞당겼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다는데 남편은 명예퇴직 후 봄부터 김장철까지 한결같이 기대와 실망의 교차지점에 멈춰 서있다.

 

밤낮이 바뀐 갓난아이처럼 거꾸로 가는 청개구리 소년 마냥, 그는 지금 여태까지 깔았던 멍석을 마다하고 새삼스레 주단綢緞을 준비하는 집사람이 되었다. 흐르는 물과 같이 날짜도 요일도 꼭 해야 할 일도 없는 일과로 얼마를 더 견디어야 할지 기약이 없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여자 사람>

 

아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그가 놀란다. 종일 실내복에 앞치마 차림이다. 개수대는 아침의 빵 접시, 점심때의 국수 삶은 냄비와 바구니, 사발 그릇이 수북하다. 컴퓨터 책상 위에는 과일 껍질과 과도가 커서cursor처럼 번쩍인다. 다리는 편안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움직이지 않으면 썩어요.” 시든 꽃 타령으로 나의 퇴근을 알린다. 서로의 귀가시간을 기다리던 시절이 분명 있었건만, 서로 내 영역만 지키겠다는 무언의 선포다. 너른 집에 정적이 머물지 않으면 한꺼번에 콩을 볶는다. 소가 닭 보듯, 닭이 소 보듯 데면데면해져 각자의 공간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는다.

 

아들 내외가 집을 구한다. 하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두 채의 집을 구한다. 아래윗집이면 더 좋겠단다. 내 집을 떠나 분가할 때, 아이가 생기면 어미 곁으로 돌아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자기네들 편한 곳으로 오란다. 그건 대놓고 육아 담당을 해달라는 일종의 선언이다. 마땅히 각오하고 있던 일이고 은근히 기대도 했었건만 막상 그 말을 듣는 순간, “뭣이라!” 총부리를 본 듯 불안이 엄습한다. 돌에 새겨 넣을 공적을 탐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예로부터 아이 본 공은 없다고 했다. 내 아이들 키울 때는 나도 이삼십 대로 젊었다. 더구나 전업주부였으니 어른들 모시고, 대소가 살림하며 연년생을 잘도 키웠으나 지금은 자신이 없다. 내 한 몸도 귀찮아 끼니를 거를 때도 있고, 멀쩡히 혼자서도 넘어지고, 가스 불 위의 냄비도 태워 먹는다.

 

어미라는 숭고한 이름으로 너희 자식은 너희가 키워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서울에서는 보모保姆에게 얼마를 준다더라. 꼭 짚어 고용 법을 들이밀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보다 젊은 사부인에게 맡기라고 시어미 용심을 내비칠 수도 없다. 내가 정신적 혼란 상태로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동안 지나치게 교양 있는 어미 이미지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실 다 핑계다. 이렇게 느닷없이 통보받고 싶지 않다. 지금 슬그머니 할머니 육아로 들어서면, 나는 다시는 온전한 나만의 브랜드를 찾지 못할 것 같다.

 

쾌속으로 다가오는 황혼을 피할까, 맞이할까? 며느리가 몇 달 후면 출근을 하는데 내가 벌써 밤잠을 설친다. 손자를 매개로 부지깽이 잣대를 들고 있다.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잉걸불을 다독인다. 한 해 한 해 춘하추동 비바람 앞에 공들여 쌓아온 세월이다. 자식들에게 편협하고 이기적인 어미의 마음을 들킬까 봐 겁도 난다.

 

잉여자산은 소멸일까, 생성일까. 인생은 타이밍이다. 아이들이 원할 때 그들 곁에 있어주는 것 또한 귀한 사람 노릇일 것이다. 단지 앞날이 불확실한 잉여부부로 살아가는 것이 두렵다.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이성과 감성의 대치상태 지점에서 한 여인의 엄살 섞인 눌변이다.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류창희 / 선우미디어

2016-3 《수필과 비평》



류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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